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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s/DEMA Talks

내가 나를 드러내온 방식에 관하여

 안녕하세요. 디마스튜디오 eyes 이해인입니다. 제 관점공유를 통해 가장 많은 위로를 받은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당장 제게 너무나도 필요했던, 이번 관점공유를 용기내어 소개합니다.


 <내가 나를 드러내온 방식에 관하여>라는 제목에서 눈치채셨듯, 이 관점 공유는 오롯이 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저 자신을 이해하고 표현하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관점 공유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혹자에게는 지루한 방식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짧은 글도, 읽기 편안한 능숙한 글도 아님을 앞서 밝히고 싶습니다.


내가 나를 드러내온 방식에 관하여


 스스로가 아무것도 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하나의 일을 수행한다. 그것은 바로 나를 드러내는 일이다. 나를 드러내는 일은 내가 사는 그 매 순간, 내려놓을 수 없는 일이다. 그와 동시에 아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나를 드러낸다는 건 꼭 타인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상은 내가 키우는 물고기가 될 수도 있고, 얼마 전에 새로 산 필통일 수도 있다. 그 대상의 시선이 실제가 아닌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의식한다. 한편으로는 그것들은 우리 스스로이기도 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타자화하여 관찰하고, 구경하며, 정제시키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달리 드러낸다는 것은 나의 선택을 필요로 한다. 내가 이것을 숨길 것인가, 보일 것인가. 이러한 갈래의 선택들을. 의식적인 부분이 늘 존재한다는 뜻이다.


사실 제법 오랜 시간동안, 나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내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싶지 않아서 였을 수도 있고, 도리어 타인의 시선을 너무 의식해서 였을지도 모른다. 나를 드러내서 부스럼을 만드느니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나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보여지는 나를 가지고, 나를 만들었다.


 물론 그것은 진짜 나와는 제법 간극이 있었다. ‘그들의 나’가 본래의 나보다 못났다고 느껴질 때, 나는 고민 없이 움직였다. 나를 내보이고, 내가 그것보다 나음을 인지시키고, ‘그들의 나’가 보다 나아질 수 있도록 바꿔왔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진짜보다 멋질 때 생겼다.



 사람들이 나를 ‘봄’으로써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몹시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지, 어떤 것을 이루어냈는지, 어떤 것에서 실패했는지. 결국 그 범주는 그들이 파악할 수 있는 선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행위를 하기 전에 많은 선택지를 염두에 두는데, 거기서 선택되는 선택지는 대부분의 경우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내가 입을 다무는 동안 내가 해야 하기 때문에 선택했던 것들을 가지고 나를 판단했다.


 당연히, 진짜 나보다 쿨하고, 차분하며, 현실적이고, 지적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좋았다. 그것들은 나의 일부였고, 나의 괜찮은 모습의 집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탈을 쓰고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들이 만든 그 탈이, 비록 무겁고 더웠을지라도, 더 그럴싸한 나를 완성시킨다고 믿었다. 더욱이, 나는 누군가를 속인 것이 아니었다. 이 탈은 그들이 마음대로 만든 것일 뿐이었다.


내가 진짜 내가 아니라 그들의 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진짜보다 멋질 때 생겼다.사실 이러한 과정이 나쁜 결과로 이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시간동안 아주 바르게 행동해왔기 때문이다. 쿨하고, 차분하며, 현실적이고, 지적이게.


 그 대신, 감출게 늘어났다.


방을 아주 깨끗하게 치웠는데 붙박이장을 열면 엉망으로 처박아놓은 살림

살이들이 제멋대로 엉켜있는 격이었다.



그래서 그게 더 무서웠다.나는 서랍마다 자물쇠를 걸어놓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축축한 냄새를 풍긴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처박혔던 것 같다. 

내가 가진 상처, 걱정, 미움과 같은 것들이 말이다. 

박아놓으면 사실은 더 썩는 것들.


 하지만 그것은 열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으니까, 볼 수 없으니까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고 나를 이해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들었던 얘기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이거다.


“너를 잘 아는데, 왜 너를 아는 것 같은 느낌이 안들지?”


 이러한 상태를 변화시킨 계기는 별거 아니었다. 아, 어쩌면 정말 대단했을 수도 있겠다.
 그냥 한 친구였다. 서랍 속을 아주아주 궁금해하는 친구.
 이 친구의 호기심은 ‘방이 왜 이렇게 깨끗해?’와 같은 의구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살림은 어떤 걸 챙겨놓고 살아?’와 같은 단순한 애정이었다.


“살림은 어떤 걸 챙겨놓고 살아?”


 그 친구는 자기 살림을 잔뜩 챙겨오고서는 두고가기 일쑤였다. 그걸 정리하다가 자꾸 생각이 났던 것 같다. 그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내 서랍을 열고나면 보이는 많은 것들이.


드디어 나는 마주했다. 보이지 않을 뿐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작은 그 친구에게 서랍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주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하나하나 자물쇠를 풀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전에는 나를 드러내는 일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향기를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에게 나를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감상할 다양한 경로를 선물해주는 것 뿐이라는 생각.


 내방에는 아직도 자물쇠가 3개쯤 달려있다. 아니다, 얼마전 여행에서 하나를 더 뜯어냈으니 이제는 2개쯤 되려나.


 이러한 순간들을 다시 되새겨 볼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을 당위성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당연하게 나를 감추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이젠 나를 드러내고 있으니까.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이 일련의 과정들은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한번쯤은 당연히 경험한 사춘기와 같이, 우리가 경험할 흐름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주기가 짧더라도, 길더라도.


 만약 이러한 시기가 당신에게 온다면, 혹은 내게 다시 이 주기가 찾아온다면, 이런 말을 전해주고 싶다.


그냥 당신에게 나타날 용사를 기다리라고.


내게 나타났던 그 친구처럼.


 이번 관점 공유는 제게는 공유보다는 하소연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하소연을 하나의 노력으로 다시 보는 계기를 얻어 기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스스로를 해방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절절하게 필요할지 모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