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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s/DEMA Talks

경계 위에 선 삶

 

안녕하세요. DEMA STUDIO eyes 서유현입니다. 저는 7학기를 마치고 1년 동안의 휴학생활을 시작하고 이제 1달 정도가 지났습니다.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저는 휴학생으로서의 고민, 그리고 살아감에 있어 문득 문득 드는 어떠한 물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올해는 예년과 달리 대학교 축제들이 9월에 많이 열렸는데요, 저는 매년 공연을 해왔지만 이번 축제만큼은 관객의 입장에서 즐긴 첫 축제라서 아주 특별했습니다. 늦게까지 축제를 기다려준 학생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는 듯 아주 오랜만에 유명한 가수가 학교에 공연을 왔습니다. 저는 많은 인파에 밀려 결국 무대가 잘 보이는 건물로 올라가서 공연을 보았습니다. 캠퍼스가 작은 편인 저희 학교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있는 것도 신기하고, 많은 학생들이 손을 들어 호응하는 모습도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제 눈을 잡아 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공연장을 많이 다녀보고, 가수들의 콘서트도 많이 다녀봤지만 제가 한번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라서 더욱 더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안전요원들이었습니다. 무대를 등지고 바로 뒤에 커다란 스피커를 둔 그들의 눈 앞에는 무대 위의 스타를 바라보는 열광적인 사람들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사람들은 마치 커다란 자석처럼 사람들을 이리 끌었다, 저리 끌었다 했지요. , 사람들은 손을 뻗어 조금이나마 그에게 더 가까워지고 싶어했고 그 때부터 안전요원들은 매우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관객들에게 안전요원은 사람이 아닌 장벽처럼 여겨지는 듯 했습니다. 어느 시선도 머물지 않는 얼굴들,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목소리. 그들은 무슨 기분일까요? 뒤에는 모두가 저렇게 열광하는 공연이 펼쳐지고 있지만 나는 시선을 돌려서는 안 되는 상황. 그들은 무대 위 스타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할까요, 혹은 이 수많은 관객들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이들 모두? 그럼 안전요원 자신은 누군가 이들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누가 지켜줄 수 있을까요? 내가 분명 그들 앞에 서있지만, 그들에게 나는 그저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벽에 지나지 않다는 느낌. 내 존재가 곧 경계 그 자체인 기분은 무엇일까요?


경계란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를 말합니다. 이쪽과 저쪽이 구분되는 어떠한 지점은 사실, 어떠한 공간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 경계란 매우 확고한 정체성을 가졌기에 다른 것들을 포함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느다란 실 위에 서있을 수 없는 것처럼 어쩌면 경계의 속은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無의 공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계라는 곳이 어디도 아닌 곳일 수는 있겠지만, 경계가 존재하는 곳은 적어도 두 공간 이상이 존재하는 곳 입니다. 또한 경계는 도로의 중앙선처럼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되는 곳 일 수도 있고, 혹은 지하철의 연결 칸처럼 그곳을 지나야 비로소 경계의 의미가 생기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구분 선에 대해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경계란 애매하고 모호한 상태와 위치, 그리고 그곳에 들어간 나 자신이겠지요.

 



 

15세기 초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안견이 그린 그림 몽유도원도를 보면 오른쪽은 너무나도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천상의 모습이고, 왼쪽은 낮은 시선으로 관망하듯 바라본 일상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크고 기이한 모습을 한 바위산이 있습니다. 두 개의 큰 바위 사이를 보고 있으면 저는 정말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無의 세계가 느껴지는 듯 해 두려운 마음까지 생깁니다. 바로 이 바위산이 천상과 일상의 경계이자 고통의 세계입니다.

경계가 두렵고 불안한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은 아닙니다. 경계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의 방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계는 그 밖에 놓여있는 상황과 현실을 동시에, 그리고 모두 잘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경계가 미처 구분하려고 하지 못한 3의 영역으로 ‘jump’할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 fusion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빛과 그림자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내 곁에 그림자가 생기고 있다는 사실, 또는 나에게 빛이 비추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입니다. 경계에 서있다는 것은 무언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을 이뤄내기 직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는 몽유도원도의 바위산처럼 고통스러운 無의 상태에 빠져있는 것 일 수도 있습니다. 경계에 서있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의미와 형태를 지닐 수 있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경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우리가 어떤 방향성을 가진 행위를 통해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행위하고 있음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위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남기지요. 어쩌면, 행위 중의 우리는 언제나 경계에 서서 경계를 벗어나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경계라는 그 규정할 수 없는 공간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마주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언제까지나 경계 위에서만 지낼 수는 없다는 것 입니다. 가능성을 가능성인 상태로만 둔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안전요원들은 함성소리가 커질 때 무대를 힐끔 돌아보기도 하고 관중들이 질서 있게 행동할 때는 잠시 앉아있기도 합니다. 혹시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등 뒤로 들리는 음악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경계이면서, 경계 위에 있으면서, 경계를 벗어나는 중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경계 위에 선 삶이란, 위태롭고 불안한 줄타기가 아닌 그저 살아감 자체입니다. 휴학생인 저와 지금 어딘가 불확실성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과, 이 글을 읽는 여러분까지. 우리의 모든 순간, 우리의 경계는 생기고 허물어지고 전에 없던 또 다른 공간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