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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s/DEMA Talks

이해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



 안녕하세요. DEMA STUDIO 핸즈 조휴담입니다. 저의 두번째이자 아마도 마지막 관점공유, 디마토크의 제목은 ‘이해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0. 프롤로그: 내가 이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



 여러분은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하나요? 저는 여름을 가장 좋아하는데, 제게 이번 여름은 힘든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일로 제가 힘들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기도 하곤 했는데, 그러던 중 우리는 왜 이렇게 인간관계에서 고통스러워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어요. “이 사람이랑 안 맞아서 힘들어”가 아닌 정말 근본적으로 왜 이렇게 힘든지, 고통스러운지에 대하여. 그렇게 저의 성찰이 시작되었고 결국 이 글은 저 자신에 대한 성찰록이라고 먼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1. 타인의 고통



 여름방학이 끝나던 개강 첫 날, 교내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게 되었습니다.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이었는데요. 전쟁과 그것을 찍은 사진,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수잔 손택은,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타인이 고통을 받는 재앙 혹은 전쟁의 상황을 이미지를 통해서 속속들이 볼 수 있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극적인 이미지의 범람이 이미지 속의 내용 자체에는 무감각해지도록 만들고 많은 전쟁 사진 속 타인의 고통은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되어버린다라고 기술합니다. 즉, 타인의 고통을 접할 기회는 많아졌으나 이 말이 곧 타인의 괴로움을 생각해볼 사람들의 능력이 더 커졌다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사고방식은 (…) 사방팔방이 모조리 이미지로 뒤덮인 세계에서는 우리에게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그 무엇인가의 영향력이 점점 떨어져 간다는 사고 방식이다. 예컨대 우리는 완전히 무감각해져 버리는 셈이다. 결국 우리의 양심을 콕콕 찔러대는 이미지는 뭔가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서 서서히 앗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중략) 이런 이미지가 마구 범람하게 된다면 사람들의 주의력은 변덕스러워지고,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며, 내용 자체에는 상대적으로 별다른 관심을 안 기울이게 된다. (중략) 전쟁이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해 왔다. 한번 충격을 줬다가 이내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종류의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반응 능력을 잃어가게 된다.」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하지만, 수잔 손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행위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2. 이해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이해한다. 그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 관점공유 당시 최재훈 헤즈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할까? 라는 물음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을 할 때, ‘이해한다’는 단어 속에는 여러 뜻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때론 이 단어의 뜻이 매우 다양하여 다의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대표적으로 하나는, 알다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너의 상황이 정말 공감이 된다는 것입니다. 둘은 명확히 분리되기 힘들지만 같은 취급을 받기도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종종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합니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이 말은 참 생략된 전제들이 많은 문장입니다. “(너의 상황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럴 수도 있지만)” 이렇게요. 그리고 동시에 이 말은 알겠다,라는 의미의 이해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공감이 아니라, 굉장히 피상적인 이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피상적인 이해는 상대방의 상황에 나를 제대로 대입해보지 않은 역지사지가 기반이 되지 않은 이해로, 나아가, “그래, 넌 그렇게 살고 난 이렇게 살면 되는 거야. 우린 달라!”라는 타자화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타자화는 이 사회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서, 사회에게서 받는 영향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개인의 일이 되는 위험한 극단적 상대주의까지 나아가기도 합니다.



 타자화와 이 극단적 상대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먼저 타자화야말로 수 많은 소수자 문제의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자는, 수적으로 적어서 소수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존재로 취급하는 것, 그것이 소수자를 만드는 아주 간단하고도 쉬운 출발인 것이죠. <역사 속 소수자들>이라는 책에서는 소수자를 ‘타자화된 인간’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왕따의 많은 이유가 ‘쟤는 우리랑 달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간단하게 이해가 되는 문제입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 받을 권리보다 다르다는 것이 더 크게 느껴질 때, 많은 소수자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게 왜 나쁘냐고요? 단적으로, 이것은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소수자를 소수자로 만드는 것 또한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고, 이 때문에 많은 성소수자들은 ‘정상인’이 아닌 ‘비정상인’이 되어 존재를 부정당하고, 자신들의 사랑할 자유를 억압받는 데에서 고통을 느끼게 되죠.



 여기에, 이 고통에 다시 한번 피상적인 이해가 결합이 되면 정말 무서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느끼고 있는 고통이, 지금 내가 직접 겪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만의 것,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사실 그 사람의 고통 저 먼 이면에는 나의 책임이 분명 존재함에도 말이죠.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이렇게 타자화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알게 되면, 우리는 이제 이 ‘우리’라는 단어에 대하여 다시 숙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던 이 ‘우리’라는 단어가 ‘우리’가 아닌 ‘그들’을 다른 존재로 만들고, 타자화시키고 소수자로 만들어 고통 받게 합니다. 한 마디로 편 가르기를 하게 되는 거죠. 결국, 너무도 당연했던 사소한 것 하나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성애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성을 사랑하다는 사실이, 성소수자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3.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이해, 동감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는 것, 그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외에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수잔 손택은 “숙고하라”라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숙고에 대하여 제가 생각하는 관점을 좀 더 설명하고자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중세 시대에 서양은 사회의 질서, 조화 이런 것들은 모두 신에게 달려 있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중세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면서 사람들은 사회가 질서 있게 돌아가고 조화로울 수 있는 원리를 신과 같은 외부적 존재가 아닌 인간 내부의 존재에서 찾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죠. 당시 영국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학파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캠브리지의 플라톤 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으로, 그들은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사회 질서의 원리를 개인의 이성에서 찾으려고 한 그룹이며, 둘째는 샤프츠베리의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 학파로서 개인에 내재하는 상식적인 도덕감각에서 사회 질서의 원리를 찾고자 했다고 합니다. 아담 스미스는 바로 이 스코틀랜드 학파로, 앞서 동감의 능력이 바로 그 도덕감정의 기초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동감이란, 자기를 타인의 입장과 동일한 입장에 놓고 타인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즉 상상에서의 역지사지 능력에 기초한 행위자와 방관자의 감정 일치를 의미합니다.





 저는 바로 이런 동감이라는 도덕감정을 통한 숙고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 동감으로부터 숙고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먼저 감정에서부터 숙고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동감은 희로애락애오욕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그 감정을 기반으로 한 이해입니다. 성소수자들도 이성애자들과 똑같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 같은 사람이라는 것. 이렇게 감정을 공감하고 동감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공감은 역지사지를 기반으로 합니다. 역지사지란, 나에게 당연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정말로 당연한가를 숙고해보는 것입니다. 내가 이성을 사랑하는 것이, 이 사람에게도 과연 당연한가? 하고 말이죠. 조선시대에는 여자가 긴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고 다니며 정조라는 걸 지키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의 여성들이 느끼는 고통은 공감하지도 않고, 숙고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이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며, 이렇게 당연시 되는 것들이 정말 당연한 지, 어떤 이들에게는 고통을 주고 있지는 않은 지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것이 숙고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4. 나비효과? 사실은 우리의 이야기


 제가 앞서 말한 공감과 이를 기반으로 한 숙고에 대하여 여전히 이걸 왜 해야 하지? 나는 당사자도 아닌데, 정말 우리가 관련이 있는 거야? 라는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이 고통 받는 대상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감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앞으로도 보장되지는 않으니까요. 약 150년 전쯤, 유럽에서는 ‘인간 동물원(Human Zoo)’라는 것이 존재했습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동물원에 가두고 원숭이처럼 구경했던 것이지요. 그 이후, 아시아인들도 같은 취급을 당하곤 하였습니다. 우리와는 조금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아프리카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된 것이지요. 15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가 유럽에 여행을 가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소수자가 됩니다. 이렇듯 고통은 먼 이야기가 아닌 상황이 조금 바뀜으로써 충분히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거창한 예시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짧더라도 고통 받는 대상이 되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이 글의 처음에 저는 왜 우리의 인간관계가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하는 물음에서 이 성찰이 시작되었다고 적었고, 그 뒤로는 줄곧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실은, 이 타인의 고통이 저의 고통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공감과 숙고의 부족이 우리를 평상시의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이죠.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공감 받지 못할 때, 저는 소수자가 되고, 고통 받는 대상이 되곤 합니다. 그것이 1분이든, 1년, 10년이든지요.


「동감의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또는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건 간에, 다른 사람도 마음속으로 우리 마음속의 감정에 동류의식을 느끼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 이상으로 즐거운 것은 없다. 또한 다른 사람이 마음속으로 우리와는 반대로 느끼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만큼 충격적인 일도 없다. (중략) 타인의 감정과 우리 자신의 감정과의 이러한 일치, 즉 동감은 기쁨의 한 원인인 것으로 보이고 동감의 결여는 고통의 한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 애덤 스미스, <도덕 감정론>


 생각해보면 우리는 친구를 만나고 연애를 하면서 소통을 하고 상대로부터 공감 받기를 원합니다. 저를 여름 내내 괴롭히던 부분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공감 받지 못하는 것. 공감이라는 것이 충족되지 않으니, 고통스럽고 괴롭고 힘들었던 것이죠. 하물며, 이렇게 짧은 순간에도 공감 받지 못하는 것도 괴로운데, 크게는 평생을 부정당하기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울까요? 나비효과는 책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우리 옆에 존재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5. 에필로그: 공감의 실패, 그럼에도 불고하고.


 저의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누군가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고, 여전히 다른 이들의 이야기라고, '타인의 고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공감의 실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실생활에서 이러한 공감의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구요. 공감한다고 이야기하였으나, 공감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공감을 실천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공감해야 하는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다른 이의 감정을 100% 공감한다는 것은 신기루와 같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회 속에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저는 공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공감이 불가능할지라도, 남을 이해하고자 하는 공감이야말로 진정한 휴머니즘의 시작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실패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시도를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 관점공유를 계기로 삼아 조금씩 실천해보려고 합니다. 주변의 작은 것부터. 역지사지부터. 당연한 것을 당연시 하지 않는 것부터. 작게는 내가 나의 취향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의 너무 당연시하는 태도에 친구가 상처받을 수도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너무 당연하게 쓰는 애플이, 스타벅스가, 나이키가 사실은 지구 반대편 어린 아이들의 노동을 착취해서 나온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저부터, 주변사람들부터 그렇게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천천히 조금씩 넓혀가다 보면 저 스스로도 조금 덜 괴로워지고 조금 덜 괴롭힐 수 있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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