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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s/DEMA Talks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DEMA studio heads 한주연 입니다. 저는 이번 관점공유를 준비하면서 느낀 것을,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문제와 연관시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관점을 공유한다는 것

 


 

‘관점공유’란 무엇일까요?

매 주 DEMA studio에서는 관점공유라는 시간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이를 나눕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 없는 부분들을 찾고, 때로 공감하고,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가끔 ‘공명’의 순간, 즉 모두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울림을 겪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이 관점공유 시간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런데 막상 스스로의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가 오면 다들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저도 예외 없이 많은 이야깃거리에 대해 생각하고 또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민하는 것들은 참 다양합니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사람들이 나에게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지만 ‘내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의 중간지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고민들을 거치며 저는 한가지 주제를 발견하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이야기하는 것’, 이 자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하는 인간

 

살아가는 동안 사람은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관점공유도 하나의 예가 되겠구요. 그런데 이 ‘이야기’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우리를 고민에 빠트리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이야기’란 바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뜻합니다. 즉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 ‘드러낸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이죠. ‘관점공유’라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관점을 공유한다는 행위, 그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행위에서 우리가 겪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닌 나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드러낼 때, 우리 스스로가 삶과 세계를 보는 관점을 유난히 직접적으로 드러내게 되며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워집니다.

 

‘관점’이라는 것은 삶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인데요. 결국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나의 관점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내 삶의 과정 혹은 나의 삶의 한 조각을 떼어 내서 타인과 나누는 것은 지극히 불편하고 어렵고 두려운 과정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이 바로 ‘이야기’하는 두려움으로도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문자로 쓰인 글이 되거나, 발화되어 말이 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야기란 결국 읽고, 쓰고, 대화하는 행위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재미있는 건 이 두려움과 동시에 제가 가장 사랑하는 행위들이 바로 읽기.쓰기.대화하기라는 사실입니다.

 


 

이야기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이야기를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하는 행위가 인간이 가진 생득적인 욕구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아가 진화적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둘러싼 수많은 요소들을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서사성’이 우리를 삶의 혼란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즉 시간의 흐름이든 공간의 흐름이든 우리가 어떠한 서사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은, 결국 우리의 생이 어떤 이야기 흐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그 흐름 속에서 일정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안정감을 주게 됩니다. , 인간이 생득적으로 서사의 욕구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자신의 삶,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일정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혼란을 피하고자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세계 속에 조각조각 위치시키고 싶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래서 이야기는 '정보'와는 다릅니다. 정보는 조각이 나도 상관이 없고, 그 조각들 형태로도 습득이 가능하며, 결정적으로 불편함을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사적 삶, 즉 흐름을 가진 이야기로서의 삶은 조각조각 단편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때로 많은 불편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의 삶 속 단 하나의 장면을 볼지라도 그 장면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과정이 분명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서사적 삶을 사는 인간의 존재는 연속적입니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이 내가 되든 타자가 되든 그 존재의 다양한 파편들을 인내를 가지고 기워나가는 과정이 됩니다.


읽기, 쓰기, 그리고 대화하기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들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저에게는 읽고, 쓰는 글 속에서 또 누군가와의 대화 안에서 존재합니다.

 

먼저 읽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까요? 저는 무언가 궁금할 때, 마음이 답답할 때 주로 읽습니다. 삶이 버거울 때 마치 본능처럼 책들을 뒤적이게 되는데요. 문장 안에서 나와 비슷한 것들을 고민하거나 생각했던 누군가를 만납니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도 이해 받고 공감하기 어려운 때에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나의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문장을 통해 만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엄청난 희열, 그리고 평온한 위안을 동시에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그의 정성을 생각합니다. 나는 생각으로만 끝내는 것들을 글로 풀어 쓴다는 것,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자신의 관점과 고민을 드러내는 행위가 내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힘들 수 있기에 문장 하나하나를 만들어 낸 정성, 그리고 한 권의 책이나 글 한 편으로까지 남겨준 정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읽기에서 넘어가 이 ‘쓴다’는 정성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저는 마음이 답답할 때 무언가 씁니다. 일기를 쓰고 나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경험은 많이 해보셨을 것 같은데요. 글을 씀으로써 정리되지 않던 파편화 된 생각들이 일정한 언어로 정리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해소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이 일정한 언어라는 것이 때로 표현의 한계로 여겨지거나 직접적이고 단순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바로 그 한계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이 있습니다. 언어라는 지극히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재단선 안에서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무정형의 이야기를 적절히 도려내고 이어 붙이는 치열한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쓰는 이의 정성이 매 문장마다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 스스로 쓸 수 있는 글들은 skit, 즉 혼자 웅얼거리는 글, 미완의 문장 같은 것뿐이라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미완의 문장이 아닌 온전한 문장, 공유 가능한 글을 쓴다는 것은 일면 ‘책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완전한 문장에는, 그 문장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보이지 않는 의지와 내려놓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그것을 깨달은 뒤 저는 그간 무언가에 책임을 지지 않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밖에 글을 쓰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조금 더 책임지는 인간이 되기 위해 쓰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해소와 해방감을 누릴 뿐 아니라 동시에 문장과 뗄 수 없는 책임감, 그리고 더욱 가시화 된 자아의 깊숙하고 은밀한 곳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깊이 성찰한 과정에서 나온 모든 문장에는 맑고 깊은 정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문장들이, 어떤 액션만큼이나 세상의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대화하는 것

 

 읽고 쓰는 것 다음으로 ‘대화하기’가 남았습니다. 여전히 제가 정말 사랑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저는 강렬한 대화를 할 때 많은 것들을 잊게 되는 그 느낌이 참 좋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존재로서 매일 하는 수많은 생각과 행동들이 있고, 그래서 때로 나 혼자만으로도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타인의 생각을 듣고 이야기를 나눈다니요? 짐을 더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행위가 오히려 때로는 버거운 이 시간과 공간을 잠시 잊게 한다는 것이 매우 신비로운 일처럼 느껴집니다. 대화 속에서 느끼는 신비로움은 단순히 이러한 ‘느낌적인 느낌’만은 아닙니다.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나를 발견할 때, 그리고 언어라는 한계를 가지고 하는 표면 위의 말들 속에서 오히려 깊이 겪게 되는 이해와 공감의 과정을 지날 때 저는 대화의 힘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대화의 힘, 즉 이해와 공감을 통해 한 사람의 서사가 다른 사람의 서사로 이어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위에서 이야기 한 이야기의 서사는 한 인간 안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나아가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서사는 존재하며 그러한 크고 작은 이야기의 흐름들이 모여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이야기는 단순히 그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으며, 그 이야기들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다른 인간을, 다른 삶을, 다른 세상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DEMA talk를 읽고 있는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

 

 처음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보려고 합니다.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 그것은 나라는 존재, 그리고 나의 삶을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고 그래서 참 어렵습니다.

 


조나단 고트쉘이라는 사람이 전 세계의 동화를 분석한 결과 이야기라는 것은 사실 삶의 다양한 면면들 중에서도 가장 문제적인 부분이 읽히고, 쓰여진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문제적이고, 문제적인 것은 불편하며, 우리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문제가 있는 삶의 이야기들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읽고, 쓰고, 대화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읽어 온 정성스러운 문장들을 공유하며 저의 이야기는 마무리하고, 대화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


 

 

*

사람을 닮은 세계

  

 ‘사람이 보는 모든 것은 친근한 얼굴을 가졌다. 이것은 우리 지각의 피할 수 없는 형식이다. 우리가 사물을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떼어 놓고 볼 수 없는 만큼 그것을 형체가 없는 모습으로 파악하기는 힘들다. 모든 형체는 우리에게 감정적인 인상을 주는데-거의 무의식적으로-그것은 유쾌한 기분을 줄 수도 있고 불쾌한 기분을 줄 수도 있으며,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안심시키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 사물들이 우리 자신을 투사한 인간의 얼굴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투사한 세계관으로 인해 우리는 모든 현상에서 인간의 형상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 어두운 방에 있는 가구의 찌푸린 모습이나 어두운 정원에서 끄덕이고 있는 나무를 보고 놀랐던 것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마치 우리를 부르듯이 다정하게 알아보는 풍경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을 닮은 세계는 모든 예술의 유일한 주제이며, 시인의 단어와 화가의 붓은 사람을 닮은 현실에다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모든 사물에서 사람을 닮은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 카메라의 앵글과 설정의 기술이다. 프레임 하나라도 중립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그것이 표현적이 되고, 제스처나 얼굴이 되도록 하는 것-이 영화 예술의 선결 조건 중 하나이다.                                    

 -  벨라 발라즈, <영화의 이론>

 

 

 

 

 

*

 

...

 

 ‘사람이  태어난 이래 줄곧

 어쩌다보니, 로 시작해서 어쩌다보니, 로 이어지는

 보잘것 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

 

나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

- 심보선, <인중을 긁적거리며>

 

 

*

 

“내 손 때가 묻어있는 연필, 빈 종이,... 글 쓰는데 필요한 백지를 챙겨서 책상머리에 앉아 글을 쓰는 과정이 사실은 내가 책상 근처에 가기 전부터 이미 시작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 과정은 내가 행동하거나 실천할 때 혹은 앎의 대상에 관해 깊은 사색에 잠겨 있을 때 이미 시작됩니다."


"
우리 스스로가 올바르게 읽고 쓰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보기도 전에, 물질적인 변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텍스트와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읽기는 그 읽기 안에 들어 있는 진보적인 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 파울로 프레이리,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프레이리의 교사론』(아침이슬, 2000)

 

 


 

*

 

당신은 참으로 젊습니다.

당신은 모든 시작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당신에게 이런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당신의 가슴 속에 풀리지 않은 채로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인내심을 갖고 대항하는 것과

그 문제들 자체를 굳게 닫힌 방이나 지극히 낯선 외국어로 적힌 책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궁금한 문제들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먼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그 해답 속에 들어와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커다란 신뢰로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

그것들이 당신의 의지에서 나올 때 즉 당신의 내면의 어떤 욕구에서 나올 때에는 그것을 미워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십시오.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당신의 성장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성장의 뒤쪽에서 처져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하십시오.

그리고 그들 앞에서 확실하고 태연하게 행동하도록 하고 당신의 의심으로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말 것이며

그들이 이해 못할 당신의 확신이나 기쁨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지도 마십시오.

당신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사랑하고,

당신에겐 친근하기만 한 고독을 두려워하는 나이 든 분들에게는 관대하게 대하십시오.

이 같은 직업의 굴레로 인해 당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의 삶이 제약을 느끼든지,

그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십시오.

당신의 고독은 당신에게 아주 낯선 상황 속에서도 당신을 위한 의지처이자 고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바로 고독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당신의 모든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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