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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s/DEMA Talks

루비스팍스 : 나와 나의 이야기

안녕하세요. 디마 스튜디오 eyes 김지혜입니다.

 제 생각을 공유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관점공유를 하려 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영화는 부부감독이 제작하고, 실제 연인 사이인 배우들이 등장하는 ‘루비 스팍스’라는 영화인데요.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고백하자면, 어떤 굉장한 관점에 대해 풀어내기 위해 이 영화를 선택했다기보다는, '나는 왜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가'라는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출발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루비스팍스는 어떤 영화인가?

 이 영화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나단 데이턴과 발렐리 패리스라는 부부 감독이 제작한 영화이고, 영화 속 연인으로 연기한 폴 다노와 조 카잔도 실제 연인 사이라고 합니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따뜻하고 사랑스런 분위기가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주인공 캘빈은 다소 이른 시기에 한 권의 책으로 스타덤에 오른 천재작가입니다. 그러나 그 한 권의 책 이후로 캘빈은 글을 쓰지 못합니다. 단순히 글을 쓰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캘빈에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보이는데요. 친구라고는 없고, 그나마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친형과 정신과 의사가 전부이며, 사회생활을 위해 키우게 된 강아지는 캘빈을 닮아 사람을 무서워합니다. 물론, 연애경험 역시 전무한 모쏠(모태쏠로)입니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 하지만, 사람도 사랑도 모르는 캘빈의 하루 일과라고는 타자기 앞에서 압박감에 시달리거나, 정신과의사를 만나 그 압박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던 중, 캘빈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실체를 모를 여자에 관한 꿈을 꾸게 되고, 그 이후 여러 차례에 거쳐 꿈 속에서 그 여자는 캘빈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캘빈은 자꾸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여자에 대해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게 되고, 밤낮없이 타자기를 두들겨 참으로 오랜만에 ‘글’이라는 것을 써보게 됩니다. ‘루비’라고 이름 붙인 이 여자의 고향, 성격, 심지어는 속옷 색까지도 묘사해 내려가면서 캘빈은 자신도 모르게 루비라는 가상의 인물과 사랑에 빠지게 되죠.


 모두들 어렸을 적 읽거나 혹은 (만화로) 본 그리스 로마신화를 기억할 텐데요. 자신의 조각상을 사랑했고, 결국 조각상이 연인이 된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겁니다. 이 신화의 현대판 주인공이 캘빈이 될 거라고는 본인도 몰랐겠지만, 어느 날 아침 캘빈은 아침 부엌에서 진짜 루비를 만나게 됩니다.

 루비를 처음 보고 자신의 광기가 심해져 보이게 된 환영이라고 생각했던 캘빈은 루비가 실제 인물로 살아났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기뻐하고, 결국 진짜 연인이 되죠. 루비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캘빈은 더 이상 글을 써서 루비를 바꾸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합니다. 


 그러나, 캘빈이 모르는 루비의 모습을 맞닥뜨리게 되면서 둘은 다투기 시작하고, 이런 다툼들이 모여 갈등이 깊어지자, 캘빈은 이전의 다짐을 깨고, 글로 루비를 고쳐가기 시작합니다. 갈등이 생길 때면, 타자기를 두드리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캘빈과 루비는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고, 결국, 루비는 캘빈이 자신을 창조했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든 캘빈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영화의 끝은 시작과 같이 아름답고 따뜻한 해피엔딩이지만, 항상 영화를 볼 때마다 끝나고 남는 여러 가지 생각들은 마냥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닌, 왠지 모를 찜찜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따라 붙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빈은 또다시 루비를 바꾸고 싶어지겠지’라는 생각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나는 왜 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는 왜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가’.


 <루비 스팍스>를 처음 본 뒤의 감상은 연인관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자꾸 내 방식으로 제련하려 하게 되고, 끝에는 내가 이전에 사랑하던 사람도, 앞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닌 모습이 되어버린다는 교훈을 주는 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특이하게도 두 번 정도 본 뒤의 감상은 부모와 자식관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캘빈이 손수 이름을 짓고, 옷 색깔까지 하나하나 결정하며 창조한 인물이 루비라는 점에서, 어쩌면 부모와 자식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부모는 크고 작은 기대감을 가지고 자식을 바라보고, 어떻게 보면 자식을 더 잘 알기에 느끼는 불만감과 불충분함이 있습니다. 또, 이런 불충분함을 채우는 데 망설임이 없다는 점이 캘빈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쯤 되면, 제 감상이 지나친 ‘갈아끼우기식’이라는 생각과 함께 우습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루비와 캘빈을 단순히 연인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라고 받아들였을 때,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느끼게 됨은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감히 마지막 ‘갈아끼우기’를 하며 제 관점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종이의 몰락이라는 큰 흐름을 거스르고도 오늘날 다양한 종류의 자기계발서들이 서점의 판매대를 차지하는 현상은 우리가 얼마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들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이야기 하면서 동시에 고쳐야 할 부분을 스스로 나열하고 ‘누구나 이 정도의 열정은 가지고 있다.’라는 뻔뻔한 태도로 독자에게 개선을 강요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나를 끊임없이 타자화시키고 관찰하고, 다른 이와 비교하는 작업을 반복하는 인생을 권하는 것이죠.


 자신을 멀리 멀리 보내는 연습은 다이어트프로에서도, 고시원 방문과 독서실 책상, 그리고 방의 메모판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위에 쓰여진 ‘자신과의 싸음’ ‘나 자신을 이겨야 한다.’ 등등의 문구들이 전의를 불태우게 하죠. 나는 나에게 끊임없이 멀리 떨어져보라고 말하고, 한 바퀴 돌아보라고 말하고,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아래위를 훑어봅니다. 나와의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마지막 이 영화에 대한 근래의 감상은 ‘나와 나’에 관한 것이었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주인공 캘빈은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몇 명도 안되고, 책을 쓰는 것조차 이어가지 못하고 따분한 하루를 반복하지만, 어쩌면 그 누구보다 치열한 스스로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 타인에게 옮아가는 모습 역시, 캘빈의 내면이 얼마나 상처받고 비뚤어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가끔 거울을 볼 때면, 이것저것 불만인 부분이 많은 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지만, 자꾸자꾸 다시 그 거울을 보게 되는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캘빈 역시 그런 이유에서 자꾸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많은 이상향과 기준들에 나를 맞추느라 나와의 끝없는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나요? 나와의 전쟁이 물론 생산적이고 유익한 것일 때도 있고, 나를 타자화시키고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 역시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자기계발을 꼭 자기폄하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자격증, 대외활동, 키, 몸무게, 심지어는 이상적인 눈썹의 모양까지 정해주는 세상에 살면서, 하루 종일, 365일 나에게 화가 나 있는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크고 작게 해왔던 다툼들에 대한 화해를 청해보는 건 어떨까요?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라는 의미가 아닌, 존중하라는 의미에서 화해말이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