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공유의 마지막 발표를 맡게 되면서, 마지막이니 한 학기 동안 충분히 생각을 많이 하면서 준비 할 수 있겠다고 좋아했던 처음의 나와 다르게 내 머릿속은 속된말로 완전 멘붕 상태였다. 막상 발표를 하게 되려니 그동안 말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여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의 관점은 무엇일까? 수없이 되물어 봐도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발표할 말을 정리하고 글을 쓰고 지우기를 수십 번 씩 하고 나서야 들었던 의문은, 도대체 왜 나는 이토록 내 관점에 대해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가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을 좋아했다. ‘마라의 죽음’등 신고전주의 미술의 창시자로써 너무나도 잘 알려진 그의 그림에 빠져 들었던 계기는 프랑스 여행 중 루브르 박물관에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보고 나서였다.
엄청난 크기의 화폭에 그려진 색과 빛의 향연이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특히 늠름한 자태의 나폴레옹과 아름다운 그의 황비 그리고 관료들의 살아있는 표정 묘사가 즉위식 장면을 너무나도 아름답고 숭고하게 표현한 것이다. 일찍이 나폴레옹도 다비드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전속 화가로 임명하였고 다비드는 그 후로도 나폴레옹에 관한 작품을 많이 그리게 된다. 나 또한 그 후로 다비드에 매료 되었고, 레포트에도 다비드에 관하여,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한 그의 걸작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에 대하여 쓰게 되었다. 그런데 레포트를 쓰는 과정에서 내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나폴레옹의 즉위식 장면을 그린 또 다른 화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 화가는 바로 영국의 풍자 화가 제임스 길레이 였다. 제임스 길레이의 나폴레옹 즉위식은 원본 사진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는데 그 이유는 그림을 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길레이의 화폭에선 다비드가 정성스레 묘사한 즉위식의 경건함과 화려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뚱뚱하고 작은 나폴레옹과 못생긴 황비, 그리고 무언가 굉장히 불만스러워 보이는 교황과 관료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을 뒤따르는 병사들의 칼엔 시뻘건 피가 묻어 있었다. 길레이가 본 황제의 즉위식은 아름다움이 아닌 수많은 희생자들의 피로 이루어진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림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또한 이 그림의 존재를 알고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갈까 국내로 그림의 반입을 철저히 금하였다고 한다.
아름답고 화려하게만 보였던 즉위식에 이러한 비하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난 더 이상 다비드의 작품을 보며 행복해 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겐 기쁨과 환희였던 역사가 다른 누군가에겐 절망과 슬픔이 될 수 도 있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라, 그토록 나에게 아름답게 보였던 무언가가 단 한순간에 불편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옛날 멕시코 시티 외곽에 있던 인디언 부족 출신인 돈 미겔 루이스의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 머릿속의 목소리는 우리 것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이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언어를 배우면서 다양한 관점이 생겨났고
다양한 비판과 거짓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식에 의해 울려 나오는 마음속의 소리는
우리가 지식을 쌓으면서부터 들려온 것이다.”
이 글을 보고 참 감탄하였다. 특히 ‘우리 머릿속의 목소리가 우리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특히나 감동적 이었다.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우리 머릿속은 무(無 )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또 사회로부터의 주입된 신념과 교육들이 우리의 머릿속에 색을 입혀 나갔을 것이다.
생각해 보자. 남자, 여자, 젊은 사람, 늙은 사람, 미운 것, 고운 것, 건강함, 질병 이렇게 세상 속에서 상반되어 분리 되어있는 단어들도 사실 좀 더 그 이미지를 깊이 들어다 보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삶에선 남자 속에 여자가 있고, 젊은 사람 속에 늙음이 있으며, 건강함 속에 질병이 있고, 탄생 속에 죽음이 있음을 알 수 있듯이 어쩌면 우리가 하는 생각이란 것도 결국 우리가 배운 지식과 생각의 한계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도 단어의 이미지가 달라지듯이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에 따라, 또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들었느냐에 따라 우리의 관점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형성된 관점을 옳은 생각이라 집착하며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만약 자신이 말이나 책을 통해 얻었던 정보가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지금까지 취했던 세상에 대한 관점은 어떻게 될까?
내가 어떤 생각을 옳은 것이라고 굳게 믿었었는데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다른 식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우리는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 을 버리곤 한다. 그러고는 믿을 만한 사람이 들려준 그 이야기를 사실로 믿게 되는 자신을 발견 할 것이다.
나 역시 이러한 모습을 내 자신에게서 수도 없이 발견 하였다. 그러니 어찌 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생각이 본래 내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이 어찌 나의 진실한 목소리라 말 할 수 있을까?
보는 시각에 따라 너무나도 달라지는 생각처럼, 사실 절대적인 가치 가장 본질적인 가치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대와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며 싸우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느냐 하는 차이에서 오는 싸움이지 않을까? 사람의 생긴 모습이 다른 만큼 세상에는 수많은 다른 관점이 존재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이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하기 보다는 그와 나의 관점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먼저 인정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요즘의 나는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더 진실한 눈으로 상대를 보고 더 깊이 그의 말을 경청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 한 것처럼 나와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평하고 비난하기 보다는 그들의 다른 관점을 이해하고 나누어 가고 싶다. 그러나 디마를 한 학기 동안 하면서 내가 바라는 모습처럼 나는 진정 다른 이의 관점을 인정하려 하였는지, 혹은 알게 모르게 나의 관점이 가장 가치 있고 진실 된 것이라 믿으며 상대방을 대하진 않았는지, 그리고 그러한 나의 태도가 우리의 관계를 왜곡되게 만들진 않았을까 하고 내 자신에게 묻게 된다. 그리고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내 자신과 지금의 이 생각들을 떳떳하게 마무리 지을 수 없는 내 자신에게 물어 본다. "나는 왜 나의 관점을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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