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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s/DEMA Talks

사람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안녕하세요! 디마 스튜디오 Heads 최재훈입니다.

 이번 학기 관점공유의 시작을 제가 할 수 있게 되어 무척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주제로 삼아 이번 관점공유를 진행해 보았습니다. 



  이 영상에서 여러분들은 '노엘 겔러거(Noel Gallagher)' 라는 사람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가난한 어린 시절, 아버지의 끝도 없는 폭력, 어머니의 부재, 그리고 영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 중 하나인 오아시스(Oasis)의 리더, 이러한 정 보를 얻었을 때 사람들은 나름대로 '노엘 겔러거'라는 사람에 대해 판단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역경을 이겨낸 의지의 사람" "암울한 현실 속에서 음악을 노래한 사람' 등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는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로 굳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을 통해 '노엘 겔러거'라는 사람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사진은 노엘 겔러거의 언행들이 담긴 사진들입니다. 이 사진들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팬들에게 거침 없이 욕설을 퍼붓는 모습, 오만하기 짝이 없는 표정과 자세, 폭력적인 그의 발언들... 만약 위의 영상을 보지 않은 채로 이 사진들을 볼 경우 여전히 사람들은 노엘 겔러거를 '역경을 이겨낸 뮤지션' 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볼까요? 그렇 다면 노엘 겔러거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는 진정으로 타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노엘 겔러거가 어떤 사람인지 계속 고찰해 보기 전에 인간이 어떻게 지식을 습득해 왔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일반화와 추상화를 통해 지식을 습득해 왔습니다. 두꺼운 갈색 기둥에 초록색 잎이 달린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일반화하여 '나무'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 개념을 tree, 목, 나무 등과 같이 문자 혹은 기호로 표시하였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이러한 식으로 만들어지고 축적되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식으로 만들어진 지식을 매체라는 수단을 가지고 전파해 왔습니다. 매체 또한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와서 종이라는 초보적인 형태에서 출발하여 신문, 책, 방송, 인터넷 등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매체가 발전함에 따라 매체의 성격이 사람이 정보를 전달받는 방식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간의 추론 능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능력은 특히 자연과학에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자연현상을 일반화시키고, 공식이나 기호로 나타내는 방법론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이해력을 급격히 올려놨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수준까지 올라서게 됩니다. 특히 이러한 방법론은 뉴턴의 프리키피아 이후로 급발전하게 되는데, 과학이라는 학문이 철학에서 독립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뉴턴에 의해 급격히 발전하게 된 과학의 영향력 앞에서 인간과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과학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어귀스트 꽁트는 사회학을 과학의 하위 분야로 정립시키고자 노력하 였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실증주의'라고 불리며 인간의 행동을 일반화 하고 추상화하여 설명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는데, 첫 번째는 경제학에서 하듯이 인간의 행위를 수식으로 분석하고 나타내는 방식이고, 두 번째는 인간을 하나의 명제로 설명하고자 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로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러한 시도들이 우리가 사람을 진정으로 느끼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요? 도가 사상을 담고 있는 '노자'라는 책의 첫머리에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의 뜻은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가 아니고, 어떤 것을 이름을 붙이면 이름이 아니다’ 입니다. 즉, 개념을 부여한다는 것이 그것의 본질을 오히려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누군가의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지 않나요? 그사람의 눈빛, 모습, 자세, 혹은 예술작품에서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 감동을 하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가서 떠나가는 스승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이 순간 학생들과 선생님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교감하고 있지 않을까 요? 그리고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을 말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이것과 같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지점에 타인을 이해하는 것의 핵심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떠한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것 같지만 사실 그 사람의 진실에 대해서는 더 멀어지는 경우가 많은 거 같습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노엘 겔러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요? 그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동영상, 사진들보다 어쩌면 그가 진심을 담아서 만든 노래 속에서 느껴지는 그 느낌에 그 사람의 참모습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말의 시대에서 무언의 이해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놓고 싶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