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디마스튜디오의 HEADS 박슬기입니다. 저의 마지막 관점공유와 디마토크를 준비하며 개인적으로 하고싶은 말들이 정말 많았었지만, 오늘은 가장 본질로 들어가 하나의 인간으로서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지극히 주관적인 방식으로 한 번 풀어내보고자 합니다 :-)
0. 내 속에서 솟아나오려는 것
데미안을 처음 읽었을 때 저의 나이가 열 다섯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책을 펼치고 첫 장의 서문을 읽자마자 무언가가 저를 스쳐지나간 느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토록 심오한, 지금 읽어도 오만가지의 생각이 드는 문장을 과연 어떤식으로 이해했을까 싶습니다만, ‘내 속에서 솟아나오려는것’을 나도 찾고 싶다,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그것을 아는 것이 아주 어려워질 것이라는 걸 예상했던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딱히 누군가의 의지대로만 살아본 적도 없고 스스로가 하고싶은 여러가지 것들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외부의 영향을 전혀 안받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꼈었고, ‘내’가 정한 기준과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려 노력했던 인간이었습니다.
1. 왜 그것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속의 이야기를 아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너무도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기준들이 더 많은 것들에 대해 알아가면서, 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가면서, 더 큰 세상에 놓이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절대적이라고만 생각해오던 가치들이 깨지면서 상대성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너무도 새로웠고, 나 자신이 한단계 더 성장하는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상대성이 감당하기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과연 내 의지대로 살고있을까 하는 의문이 자꾸 들었습니다.
힘에 부치기 시작하자 자꾸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게 시작되었습니다. 현재의 나를 이루어낸것은 분명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 맞겠지요. 치열함 속에서도 소소한 행복들을 놓치지 않으며, 스스로 만족하며 아주 잘 살아왔다고 믿어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만족하지 않을 뿐더러 “나는 뭘 잘하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지?”라는 의문이 끝도 없이 생겼고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왜 일까요.
2. 나는 누구인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라는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가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그의 철학 전반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개개인의 현존재(Dasein)가 가진 고유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정통 형이상학이나 이후의 입장에선 어찌보면 상당히 주관적인 논리일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실존주의에 대한 공감이 개인적으로 존재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져 몇가지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규명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인간의 ‘거기-있음’에서 시작하는 현상학적 기술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이 있어야만 세계가 있다는 인간 중심의 가정 하에 모든 논리가 진행되지요. 넘어가서 이 인간의 ‘거기-있음’이라는 말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거기-있음’에서의 ‘거기’는 ‘세계’를 뜻합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있음’은 단순히 그 자리에 놓여있음이 아닌 ‘관계맺음’의 측면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관계맺음의 측면은 두 가지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인간은 세상에 놓여진 타자들, 사물들, 공간들과 타 대 타로서의 관계를 맺지요. 하지만 타 대상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관계를 맺습니다. 바로 그들 자신이 지나온 과거, 바로 그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와의 관계입니다. 즉, 인간의 ‘거기-있음’을 해석한다면 인간은 세계[=거기] 안에서 여러 차원에서의 관계를 맺어[=있음]나가며 존재 자체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자신이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을 증명만 하는 차원에서는 우리 존재에 대한 물음이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각자 객체로서 어떻게 있어야[=존재해야] 하는지도 걱정해야하기 때문입니다.
3.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어떻게?”의 고민 과정 속에서 이제 인간은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행위’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타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행위하며, 또한 나의 내면과도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도 무언가를 계속 실천해나갑니다.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이런 능동적 인간들은 가능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존재해야 하나?”라는 물음의 핵심은 바로 우리는 인간인 한 죽음으로 소멸되기 이전까지 끊임없이[=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삶의 연장선 속에서 현재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현재의 나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연속적인 존재인 나 자신이 과거부터 “잘 해왔던 것”을 알고, 동시에 미래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단순한 ‘잘 함’의 차원을 넘어서는.)
즉, “내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곧 “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로 이어지고, 우리는 과거부터의 자기동일성을 찾아내어 그것을 끊임없이 미래로 던지면서 현재의 나를 끊임없이 만들어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4. 현존재에 충실한 미래투사적 가능존재
개인적으로 하이데거가 ‘실존’이라는 주제 아래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면서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는가?”라는 물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살아가는 주체이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 인생에서 너무도 당연한,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어야합니다. 하지만 현재에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제약과 시선, 불편함 등으로 인해 이렇게 나 자신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현재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현재의 자신만을 바라보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과거의 동일성에만 너무 얽메이지도 않았으면 합니다. 연속적인 시간선상에 존재하는 우리가 현존재로 도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꿈꾸는 미래[=내가 할 수 있는 것]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아는 데에는 과거와 현재의 제약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의 내부적 존재가 내는 소리를, 내가 하고 싶어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면서 우리는 현재의 자기이상과의 불일치를 딛고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요?
5.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다시 <데미안>으로 돌아와서 그런데도 그들은[=우리는] 왜 그렇게 불안한 걸까요? 이 구절이 너무도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는 사실 한번도 자기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법칙들이 이제는 맞지 않음을 느끼고 있는 것.
사실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이야기들은 제가 현재의 저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존재한다.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 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능존재가 되고 싶다. 나는 될 것이다. 능동적으로 행위하면서. 미래에 지속적으로 나를 던지면서. 현재의 나를 이해하면서. 나 자신으로 존재하면서.
누군가는 너무도 이상적인 제안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근원적 부분이 채워질 때에, 우리의 가능성을 탐구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 참고 -
<시간개념> 마르틴 하이데거, 길
<데미안>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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