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Dema studio heads 배수민입니다. 제 두 번째 이야기는 강과 관련된 두 권의 책을 여러분께 소개하며 시작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책은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입니다. 고귀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난 싯달타는 자신에게 주어진 풍족한 삶을 거부하고 구도의 길을 떠납니다. 여행 중 그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얻지만, 깨달음을 얻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방황하던 싯달타는 결국 어떤 강에 다다릅니다. 그 강에서 뱃사공을 하는 노인은 모든 것을 깨달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싯달타에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이라는 책입니다. 주인공인 미쓰코는 대학 시절,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감정 없이 여러 남자를 만나곤 합니다. 신학교에 다니는 쑥맥 오쓰 역시 그녀의 희생양 중 한명으로, 신앙을 포기하고 그녀를 위해 평생을 다 바칠 결심까지 합니다. 하지만 미쓰코에게 오쓰는 그저 심심풀이였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를 금방 떠나가 버립니다. 그가 가르쳐주는 신에 대한 이야기도 알려고 조차 들지 않고 모두 거부해 버립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미쓰코는 결혼을 하고도 공허함을 채우지 못해 남편과 갈라서고 맙니다. 이러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그녀는 신부가 되어 갠지스 강에 살고 있는 오쓰를 찾아 떠납니다.
제 이야기는 몇 달 전 제가 받았던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럿이 함께 있던 자리에서 누군가 “너는 어떤 사람이 좋아?”라는 질문을 던졌고, 저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은 계속 제 머릿속을 맴돌았고, 지금 그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가르치려 들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말들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꼰대’ 라는 말입니다. ‘꼰대’는 번데기를 다르게 일컫는 ‘꼰대기’라는 말에서 왔다고 하는데, 원래는 나이든 사람을 뜻하는 은어로 쓰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 요즘 ‘꼰대’라는 말은 나이와 상관 없이 누구든 자신의 경험과 지위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즉, 그는 ‘가르치려 드는 사람’ 입니다.
가르치려 드는 사람은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타인이 받아들이는 것이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르는 것을 알게 되면 도움이 될 때도 많습니다. 알지 못했던 경험을 그 사람이 알려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그가 알려 주는 것들을 차라리 몰랐던 것이 나았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친다는 행위만큼 무서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곧 백지 같은 사람이라, 그에게 누군가 한 획을 그으면 그것이 그대로 시작이 되고, 법칙이 되고, 세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 첫 획에 따라 백지가 어떤 모습이 될지 결정되는 것이기에, 그 획을 긋는 사람은 정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가르치는 사람의 주관을 배제하는 것만이 옳은 가르침일까요? 그 전에, 그러한 가르침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제가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알고 있어야 가르칠 텐데, 내가 아는 것들 중에 온전하고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설령 한 분야의 최고 권위자라도, 그것이 가진 모든 측면들에 대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모든 것이 변화하고 발전해나가는 이 세상에, 완벽히 알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게 내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그것을 안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위한 여정을 한 발짝이라도 걸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여정에서 내가 걸었던 발자국만큼이며, 그 여정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발자국을 걷는 동안 내가 얻었던 모든 것은 곧 나의 앎입니다. 이 여정을 나와 동일하게 걸으며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나와 다른 앎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게 ‘알고 있음’은 곧 무언가 형언할 수 없지만 ‘깨닫고 느끼고 있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싯달타는 붓다의 가르침을 얻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구도를 위해 길을 떠납니다. 그는 여자와 상인을 만나 가르침을 받지만 오히려 그들에게선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뱃사공과 강의 소리를 들으며 가장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르침을 얻기 위해 찾아온 자신의 옛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소용 없는 것이라고. 말이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다고.
미쓰코 역시 오쓰가 가르쳐 주기 위해 애쓴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하다가, 그가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갠지스 강에 몸을 담그며 오쓰의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토록 거부하던 신 조차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처럼, ‘깨닫고 느낀’ 것들은 절대 가르쳐 질 수 없습니다.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처럼 가르쳐 주는 사람이 하는 말로 어렴풋이 대상을 이해하려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여정을 직접 겪고 깨닫지 않는 이상, 절대 완전히 이해하거나 배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르치지 않는 사람은 마치 강처럼 묵묵히 흘러갑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강요하지 않고 그저 보여 줍니다. 결국 그것을 보고 내 자신이 깨달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 사람의 여정 자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여정에서 느낀 바를 보는 것입니다. 한 발짝 떨어져 먼 발치에서 흘러가는 강을 보듯 그를 보고 내가 온전히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Sessions > DEMA Tal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자만의 시간 갖기 - 서혜지 (0) | 2015.09.08 |
---|---|
학교에 왜 다니나요? - 이수헌 (0) | 2015.09.08 |
Born Hater - 백재현 (0) | 2015.09.07 |
서사적인 삶, 그리고 나의 삶 - 이수헌 (1) | 2015.06.16 |
삼시세끼 - 서혜지 (0) | 2015.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