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사람을 믿지 않고, 너무 사람을 분석하고 생각이 많아.” 이러한 종류의 말들을 나는 수도 없이 들었다. 나도 이러한 나의 냉소를 인정한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냉소적인 경험이 있다. 친하던 친구가 위선과 가식에 대하여 비난 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 친구야말로 사람과 거리를 두며 정치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 이였다. 난 그런 친구의 양면성을 보자마자 역겨움을 느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직설적으로 나의 생각을 밝혔다.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그 친구와 같은 부류가 될 것 같았다. 모순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결국에 친하던 그 친구와는 멀어졌고, 서로에 대해 그저 거리를 두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에 대한 냉소는, 다행히도 나에 대한 냉소와 그에 따른 실망으로 까지 이어졌다. 아니 지금도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결국엔 너도 나도 모순에 빠져버리고 만다. 하지만 난 여전히 냉소적이다.
이러한 나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은 큰 여운을 주었다. 그것은 감동이 아닌 묘한 우울감이였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는 순수한 아이들 외에는 모든 것을 싫어하는 소년이다. 명문 사립고등학교에서 낙제한 홀든콜필드 학교를 떠나는 3일간의 여정이 책에 담겨있다. 홀든은 주위에서 보는 '위선자들'을 자주 골라냄으로써 정직하지 못한 것과 가식을 경멸한다.
이 책은 사회적으로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존레논의 암살범 마크체프먼이 탐독한 책, 엘라인카잔의 영화화 제안을 거절한 책, 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된 책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콜필드의 반항기가 미국 전역을 뒤덮어 ‘콜필드 신드롬’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노래하기도 했다.
나에게 콜필드 신드롬은 일종의 멋진 이유를 만들어 준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콜필드에 열광하고 있다니! 그것은 인간모순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가 반영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콜필드가 되어버린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나서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고, 생각하기도 멈추고 싶은 느낌을 받았다.
나도 학교가 싫었다. 이사를 하게 되어 중학교 때 50분정도 걸리는 거리에서 통학하였다. 하지만 중학생인 나에겐 그러한 통학시간은 큰 짐이였다. 지각을 하면, 우선 학생부 선생님에게 오리걸음 등의 벌을 받았다. 그리고 담임선생님께 들어가서 또 맞고, 남아서 청소를 했다. 우리 반은 두 번 아니 청소까지 세 번의 벌을 받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이 했던 말이 기역난다. “나도 너 멀리서 통학 하는 거 알고, 그래서 더욱 벌주기 싫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다른 반 아이는 받지 않는 벌을 추가로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여 모든게 부정적으로 다가왔고 나는 무단으로 학교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학교 밖에서 느끼는 것은 무기력함 이였다. 힘없는 나에게 사회 모순에 대한 고뇌나 비판이니 하는 것은 나를 닳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황은 내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때 이후로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혐오는 보통 가치판단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가치판단에 의해 ‘나’라는 기준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나’라는 기준에서 나 또한 모순을 겪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방황하고, 이 과정에서 사람은 벼랑끝에서 ‘전환점’을 맞이 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혐오를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하고 억누르거나 외면하기 보다, 그 혐오를 마주해보는 것은 어떨까. 혐오라는 감정을 붙잡고 기꺼히 방황하는 것은 멀리서보면 애정이다. 그 애정이 벼랑끝의 나를 구원해줄지도 모른다.
ps,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green day의 who wrote the holden caulfield, basket case를 들어보길
이러한 나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은 큰 여운을 주었다. 그것은 감동이 아닌 묘한 우울감이였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는 순수한 아이들 외에는 모든 것을 싫어하는 소년이다. 명문 사립고등학교에서 낙제한 홀든콜필드 학교를 떠나는 3일간의 여정이 책에 담겨있다. 홀든은 주위에서 보는 '위선자들'을 자주 골라냄으로써 정직하지 못한 것과 가식을 경멸한다.
이 책은 사회적으로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존레논의 암살범 마크체프먼이 탐독한 책, 엘라인카잔의 영화화 제안을 거절한 책, 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된 책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콜필드의 반항기가 미국 전역을 뒤덮어 ‘콜필드 신드롬’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노래하기도 했다.
나에게 콜필드 신드롬은 일종의 멋진 이유를 만들어 준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콜필드에 열광하고 있다니! 그것은 인간모순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가 반영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콜필드가 되어버린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나서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고, 생각하기도 멈추고 싶은 느낌을 받았다.
나도 학교가 싫었다. 이사를 하게 되어 중학교 때 50분정도 걸리는 거리에서 통학하였다. 하지만 중학생인 나에겐 그러한 통학시간은 큰 짐이였다. 지각을 하면, 우선 학생부 선생님에게 오리걸음 등의 벌을 받았다. 그리고 담임선생님께 들어가서 또 맞고, 남아서 청소를 했다. 우리 반은 두 번 아니 청소까지 세 번의 벌을 받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이 했던 말이 기역난다. “나도 너 멀리서 통학 하는 거 알고, 그래서 더욱 벌주기 싫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다른 반 아이는 받지 않는 벌을 추가로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여 모든게 부정적으로 다가왔고 나는 무단으로 학교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학교 밖에서 느끼는 것은 무기력함 이였다. 힘없는 나에게 사회 모순에 대한 고뇌나 비판이니 하는 것은 나를 닳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황은 내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때 이후로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혐오는 보통 가치판단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가치판단에 의해 ‘나’라는 기준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나’라는 기준에서 나 또한 모순을 겪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방황하고, 이 과정에서 사람은 벼랑끝에서 ‘전환점’을 맞이 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혐오를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하고 억누르거나 외면하기 보다, 그 혐오를 마주해보는 것은 어떨까. 혐오라는 감정을 붙잡고 기꺼히 방황하는 것은 멀리서보면 애정이다. 그 애정이 벼랑끝의 나를 구원해줄지도 모른다.
ps,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green day의 who wrote the holden caulfield, basket case를 들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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