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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s/DEMA Talks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박종환

저번 학기 관점공유를 하고 나서 한 달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관점공유의 오그라드는 기억 때문에 밤에 이불을 찼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절대 오그라드는거 하지 말자, 절대 내 이야기 하지 말자. 하는 태도로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 준비해놓고 보니까 결국 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자, 지금 저의 가치관 형성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인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소개하며, 여러분들과 나눠 보고 싶은 한가지 화두를 던져보고자 합니다.


제목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인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인지 참 헷갈리게 번역을 해 놓았는데요, 뭐가 진짜 제목인지는 발표를 들으시다 보면 알게 되실 것 같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 제목이든, 참 읽기 싫어지게 만드는 제목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책은 네 남녀의 사랑이야기이고, 작가가 던지는 수 많은 생각거리들과 함께 정말 쉽게 읽히는 책입니다. 생각할 거리가 수도 없이 많은 책인데다가,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의 줄거리를 다 소개하고, 하나하나 이야기 나눠볼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도입부의 딱 두 문단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 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굉장히 냉소적이고, 비관적이어 보이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이 첫 두 문단에 5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의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버나드 쇼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다섯 페이지" 라는 말로 이 도입부를 수식했습니다.


실제로, 삶은 한 번 뿐입니다. 더 미시적으로 들어가면 모든 순간은 한 번 뿐입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절대로 되돌이킬 수 없으며, 반복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선택의 연속인 삶에서 매 순간은 반복되지 않고, 돌이킬 수 없기에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는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의 순간에 두 가지 선택을 동시에 하고, 비교해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하나의 선택, 하나의 삶, 나아가서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굉장히 가벼운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의 자아는 가벼운 자아입니다.


이러한 ‘가벼운 자아’ 개념은 굉장히 난해한 문제를 파생합니다. 바로 ‘무지에 의한 참상’ 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 아무도 답을 알 수 없는 선택에 직면한 자아라고 할 때, 그렇다면 그러한 선택의 결과가 빚어낸 참상의 책임을 묻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야! 너 왜그랬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굉장히 흔한 경우입니다. 이러한 무지에의 호소는 상당히 많은 경우에 면죄부가 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가벼운 자아’ 개념에 합의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조금 더 스케일을 키워보도록 하겠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약 200만 명의 유태인 학살을 주도한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전범자 재판에서 "나는 몰랐다. 나는 그저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에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우리 선택의 결과에 대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가벼운 자아’라면, 우리는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이 경우를 포함해 수 많은 ‘무지에 의한 참상’ 이 역사적으로 존재해왔고, 그럴 때 마다 무지는 이러한 참상의 책임자가 매번 기대왔던 면죄부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매 순간 선택에 직면하며, 그 선택의 결과와 옳고 그름을 영원히 알 수 없는 ‘가벼운 자아’ 라면, 무지에 의한 참상의 책임은 도대체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 걸까요?


한 편, 무지에 의한 참상을 스스로 단죄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오이디푸스의 신화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했습니다.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이러한 참상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 자신의 눈을 뽑아버리고 테베를 떠납니다. 비록 무지한 채 저지른 일들이지만, 자신의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 낸 결과이고, 그 선택들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오이디푸스 신화에 나오는 자아는 바로 서사적 책임을 떠안은 ‘무거운 자아’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태어나서, 결과를 알 수 없는 선택들만을 반복하다가, 알 수 없는 언젠가 죽어 스러지는 ‘가벼운 자아’일까요? 아니면 매 순간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선택을 내리고,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무거운 자아’일까요? 나아가서 우리 스스로 존재의 무게를 어떻게 재단할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인생 별거 있나 하는 쿨한 태도로 즐기다 가면 그게 행복일까요 아니면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고 세상에 유의미한 발자취를 남기려는 노력을 통해 행복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생각들을 하며, 참 많은 것이 결국 ‘거리 두기’ 에 달려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찰리 채플린이 한 말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자아의 무게’ 라는 개념과 정말 맞닿는 부분이 많지 않나요? 인생의 주인공의 시점에서 보면 인생은 참 무겁고 진중한, 비극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매번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며, 그 선택이 나와 주변인들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라 안절부절 해야하고, 책임까지 져야 합니다. 반면 인생을 멀리서 보면 그냥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가는 것이고 거대한 우주 속의 한 낱 먼지만도 못한 존재인 거죠. 인생만 그런게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은 어떤 거리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무게가 극명히 다릅니다. 역사를 살펴볼까요? 영화 명량 보셨나요? 과연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웠던 용사들이 모두 조선의 수호신이고, 구국의 영웅일까요? 그렇게 영웅적으로 일제와 싸우다가 죽었을까요? 아닙니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 중에서는 분명 무서워서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뱃멀미로 구역질만 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무서워서 배 구석에 박혀서 숨어있다가 죽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요즘 스타트업에 있으니까 스타트업으로 이야기 해 볼까요? ‘배달의 민족’ 정말 잘나갑니다. 멀리서 보면 배달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 같고 광고는 톡톡 튀고 창의적이며 수 백억의 투자를 유치 받고 무슨 어마어마한 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근데 조금만 가까이서 보면,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이 그렇게 대단한 일일까요? 아닙니다. 길거리에 떨어진 전단지들 주워다가 식당 정보 입력하고, 식당 찾아 다니면서 사장님들하고 제휴 맺고, 그런 일 합니다.


결국 삶에 대해 건강한 시각을 갖는 것도, 사물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통찰을 가지는 것도, 적당한 거리에서 볼 줄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