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디마토크에서 풀어낼 이야기는 프로이트와 라깡의 정신분석학입니다. 그리고 칙센트미하이의 창조성 이론에 따라 정신분석학이 적용될 수 있는 우리의 접점을 찾아보려 합니다.
프로이트와 라깡의 정신분석학
정신분석학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익히 들은 바와 같이 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무의식에서 발산하는 에너지의 근원인 성욕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정신을 무의식의 바다인 이드, 사회문화적으로 정립된 규율의 총체인 초자아, 그리고 이드와 초자아의 경계에서 둘 간의 조화를 꾀하는 자아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정신적 에너지인 리비도의 흐름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병리적인 증상을 보이지만 육체적으로는 전혀 문제를 찾을 수 없는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성장과정에서 거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상이 생김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성적 욕망이 자아에 의해 억압되면서 이 억압된 에너지가 다른 신체적 증상으로 발현된다는 것이었죠. 프로이트의 신경증 치료는 환자들이 유아기 때부터 겪어왔던 수많은 사건들과 성적 경험이 환자에게 현재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파고듭니다. 각종 윤리체계와 후천적 교육으로 인해 스스로 부정하게 되는 ‘무의식에서 추구하는 욕망’을 의식차원으로 끌어올려, 그 욕망에 대해 주체가 의식적인 인식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로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해석해 내는 도구로써 프로이트는 환자들의 꿈을 분석합니다. 결국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주체가 어떤 것들을 겪으며 살아왔고, 어떤 욕망들을 무의식적으로 품어왔으며 현재 상황에 비추어 이 욕망들이 왜 지나치게 억압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주체의 정신을 그 사람이 겪은 모든 경험들을 토대로 분석해 내는 것이었죠.
프로이트가 인간의 정신을 이드와 자아, 초자아라는 렌즈를 통해 분석했다면 라깡은 ‘언어적 구조’를 통해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접근합니다. 또한 프로이트가 성욕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라깡은 주체와 그가 인식하는 세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정신적으로 작용하는지 설명하는 데에 더 집중합니다. 이리하여 라깡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세 가지 렌즈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순차적으로 정립해갑니다. 라깡의 이론은 ‘거울의 단계’로 시작합니다. 유아는 태어난 이후 자신과 세계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아예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조차 없는 상태지요. 처음으로 자신과 외부세계 간 구분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단계가 바로 ‘거울의 단계’입니다. 이는 말 그대로 유아가 거울 본 자신의 이미지를 ‘자기 자신’으로 인식하게 되는 단계인데요, 이를 통해 유아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의 ‘이미지’로 인식할 수 있게 되고 자신과 외부 세계를 구분된 이미지로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 유아는 언어를 습득하며, 그리고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오이디푸스기를 거치며 세계를 이미지와 더불어 기호와 상징(Symbol)으로 체계화하게 됩니다. 특히 라깡은 언어학자 소쉬르가 주장했던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진 언어체계에 주목하게 됩니다. 소쉬르의 기본적 입장은 언어가 그것이 지칭하는 의미(기의)와 이를 표기하는 기호(기표)로 이루어져 있고, 기표와 기의를 연결하며 우리는 의사소통을 하고 사고체계를 정립해간다는 것입니다. 라깡은 이와 유사하게 시니피에(기의)와 시니피앙(기표)으로 구조를 나누고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간의 절대적 관계를 부정합니다. 가령 ‘강’이라는 기표에 들어갈 수 있는 기의는 그때그때의 문맥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시니피에와 시니피에 간의 절대적인 함수관계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지요. 그리고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을 연결해 주는 고리가 발생하며 의미화가 일어나는 순간, 그 지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주체’라는 것이 발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라깡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천명하는 주체의 절대성을 강하게 부정합니다. 이처럼 언어를 습득한 주체는 세계를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간의 수많은 접점으로 구성해 나가며 ‘상징계’로서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은 주체에게 이미 수많은 구성원들이 양산한 기호와 상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때문에 라깡 철학에서의 주체와 그의 자아, 그리고 그의 사고는 전혀 ‘주체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라깡의 이론을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로 축약하는 일면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징계’로 구성되는 인간의 세계 때문에 주체는 필연적으로
결핍을 안게 됩니다. 기호와 상징으로 구성된 주체의 세계 속에 ‘진짜’는 어디에 있을까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모니터는 여러분의 사고체계 속에서 모니터로 인식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모니터라고 불리는, 혹은
여러분들 속에 의미화된 상징으로 인식하는 것일까요.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니터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이점이 라깡의 후기 이론이 ‘실재계’를 통해 뻗어가는 이유가 됩니다. 라깡은 ‘상징계’로 인해 구성되는 세계 속에서 언어와 기호로 인해 우리가 인식할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는 존재물 그 자체(Thing)를 ‘실재계’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의 궁극점은 기호와 상징으로 잃어버린
실재 자체에 대한 결핍, 그로 회귀하고 싶은 갈구이며, 이는
인간이 생존하는 동안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 욕망의 끝은 ‘죽음 충동’으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정말 ‘자살해야겠다’라는 충동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느끼는 공허함, 허전함, 그리고 근원적인 고독의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정신분석학의 이론들은 우리에게 ‘나’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갖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사실 나의 참된 바람은 무엇인가’, ‘과거의 나의 기억들은 현재 나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들에 대한 분석의 참조가 될 수 있고 라깡의 이론은 보다 일반적인 범주에서 ‘사람은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신작용을 하는가’, 더 나아가 ‘사람이 추구하는 것의 끝은 무엇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이처럼 정신분석학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을 돕고, 자신의 참된 모습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에 맞설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이지요.
칙센트미하이의 창조성 이론
칙센트미하이는 이탈리아 출신의 심리학자로 Creativity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며 우리에게 ‘창의성의 즐거움’, ‘몰입 Flow’로 명성이 알려진 교수입니다. ‘창의성의 즐거움’이라는 저서에 상세하게 소개된 칙센트미하이의 창조성 이론은 역사적으로 창조성을 발휘한 천재들의 케이스를 분석하며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들 것 공식화한 것입니다. 칙센트미하이는 Creativity를 단순히 예술에서 발현되는 창조성이 아니라 New & Useful이라는 넓은 범위에서 정의합니다. New하다는 것은 문화적 맥락 속에서 해당 인물의 업적이 이미 존재하는 분야에서 더욱 심화되거나(진보), 혹은 다른 분야와의 새로운 융합을 꾀하거나(융합), 아예 새로운 분야를 창시하는(창시)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적인’ 방법으로 돈을 엄청나게 빨리 사는 은행직원이 유럽의 은행에서 그렇게 돈을 세자 유럽의 은행직원들이 신선한 방법이라고 인정해서 은행의 ‘돈 세는 법 표준’이 된다면 이것도 창조성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또한 창조성은 Useful해야 됩니다. 그리고 유용하다는 것은 어떤 ‘문제의 해결’을 의미합니다.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이 ‘문제’에 대해서 교육을 받는 시기에는 부모나 교육자가 제시하는 문제들을 풀어가는 과정을 거치다가 스스로 ‘자신에게 던지는 문제’를 해결하느냐가 관건이 됩니다. 그리고 이점에서 라깡의 실재계에 대한 이론과의 접점이 생겨납니다.
라깡은 수많은 예술가들이 시도했던 예술들은 ‘언어적 의미’ 때문에 인간이 논리적으로, 혹은 살아가면서 절대로 간파할 수 없는 실재계를 향한 회귀의지의 몸부림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는 칸트가 예술가의 상상력을 ‘언어적 의미가 현시해 낼 수 없는 어떤 것을 포착해내 현실로 끌어 들이는 능력’이라고 했던 것과 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라깡의 실재계이론이 여기서 보다 의미를 갖는 이유는 ‘주체에게 발생한 결핍’으로 생긴 문제의식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정말 쉽게 보았을 때, 가끔 드는 ‘아… 나 왜살지…’, 혹은 ‘요즘 너무 고독해’ 같은 표류의식이 예술적 표현의 발단이라고 약간의 비약을 섞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라깡이 이야기한 ‘죽음충동’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드리워진 불확실성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확실성에 의해 생긴 어떤 화두를 언어라는 기호와 상징의 장막을 교묘히 피해 ‘비스듬히’ 대상을 간파할 수 있는 예술로서 해소하는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칙센트미하이의 창조성 이론에서는 이 불확실성을 해소함에 있어 확고한 ‘자신만의 문제’를 화두로 잡고 이를 수년에 걸쳐 해결해 가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술이라는 방법에 한정되어 우회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키고 노력하는 방법으로 각 분야에서 ‘자기만의 예술’을 완성시키길 바라는 것이지요. 때문에 창조성 이론에서는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학술인, 심지어 기업가까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창조성을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홀바인의 <대사들>, 자세히 보면 그람 하단에 해골이 있으며, 이 해골은 그림을 옆에서 비스듬히 볼 때에만 제대로 보인다. 이처럼 물(Thing)이란 우리에게 인식되지는 않지만 언제나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어느 순간 드러내 우리를 사로잡는 그러한 대상이다. 라깡은 세미나 제7권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홀바인의 그림을 통해 보이지 않는 물(Thing)을 표현하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시선을 길들여보려고 하는 것이 에술의 본질이라 설명한다(무의식에로의초대 167).
창조성 이론은 창조성 자체에 대한 정의뿐만 아니라 이를 어떤 방식으로 평생에 걸쳐 실현시켜가느냐에 대한 상세한 이론적 설명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것들을 이행해 감에 앞서, 한 개인이 삶에서 창조성을 발현하는가는 전적으로 ‘자신만의 물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물음, 혹은 문제는 현재의 자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할수록 더 구체화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잡고 가는 자신만의 삶의 화두가, 고민이 깊었을 수록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방향성으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창조성 이론에서는 기본적으로 어느 한 분야에서 창조성 있는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화두로 잡은 문제가 속한 필드를 완벽하게 답습하는 데에만 10년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결국 무엇인가를 실현해 내는 데에는 이 고독한 투자시간을 견뎌냈는가가 좌우합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 이에 고민하고 분석한 결과로 나온 자신만의 ‘삶의 화두’가 자신에게 값질수록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에 대한 고민의 시작점과 문제의식의 발단이 꼭 정신분석에서 시작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철학이 될 수도, 직접 몸을 부딪히며 얻는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또 그 화두라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들을 효율적으로 풀어가는 세속적인 것일 수도, 이상적인 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민을 계속 진행하고 있느냐’와 ‘그에 대한 방향성의 줄기를 가졌는가’이겠지요.
청춘담론
글을 쓰다 보니 마치 요즘 범람하고 있는 ‘청춘담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야기 같습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앞만 보고 달리느라 진정한 자신을 잃고, 또 사회 시스템적 문제 때문에 꿋꿋이 자신의 꿈을 지켜가기도 힘든 청춘들에게 ‘끝까지 꿈을 잃지 마라, 너 자신을 믿어라’라는 메시지들이 요즈음 들어 부쩍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의 디마토크도 비슷한 맥락에서 출발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라깡의 실재계 이론과 칙센트미하이가 제시한 창조성 이론은 단순히 아픈 청춘을 달래주고 긍정의 힘을 주려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론들은 ‘청춘들에게 주는 힐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냉철함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현대의 청춘들이 겪는 불확실성과 자기에 대한 모호함,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실제로 이루어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합니다. 정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내가 삶에서 추구해야 될 나만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그 방법론이 어찌 되었든 계속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힘을 키우려 최선을 다해야, 그렇게 오랜 시간 자신의 모습과 방향성에 대해 고민을 한 다음에야 진정한 실마리가 보이든 그렇지 않든 이후의 자신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정말 푹 빠져 평생 그것만을 위해 전념하고 그로 인해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종종 ‘저런 사람들은 축복 받은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찾기도 힘들다’라고 치부하곤 합니다. 하지만 창조성 이론에서는 창조성을 실현한 사람들이 눈에 띄게 뛰어났던 것은 ‘자기성찰적 지능’이라고 합니다. 무엇인가 특별한 사람이 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점이라는 것이지요. ‘당신이 걷는 길이 맞아,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마’라는 응원의 메시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스스로 지금 내가 내리는 판단들이 어떤 고민들로 나온 근거들에 의한 것인지, 그래서 내가 찍고 있는 선택의 점들이 그려왔던 방향성은 무엇인지 스스로 냉철하게 분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확신과 불확실성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긍정의 힘이 아니라 10년의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스스로 불확실성을 줄여나갈 수 있을 만큼의 능력과 이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프니까 청춘이기는 하지만, 아프면 어디가 아픈지 알아야 하고 안 아프려면 운동을 해야지요.
창조성 이론은 일종의 ‘성공을 위한 공식’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또한 누구에게 ‘삶은 이런식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할 수도 없는 사회입니다. 또한 이론에서는 마치 끝내 창조성을 실현한 사람들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고민 속에서 하루하루 내딛고 있는 자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성공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창조성 이론이 여태까지의 나와 현재의 나는 이 틀에 비추어 어떻게 살아왔나를 성찰할 수 있는 비판적 거울로서의 가능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러 다른 관점들과 비판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만- 오늘 디마토크가 잠시나마 ‘지금 얼마나 자신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자신만의 삶의 화두를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DEMA HEADS_김준환
참고
김상환,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문학과지성사, 2012
김석, <프로이트&라캉 무의식에로의 초대>, 김영사, 2013
김석, <에크리 :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살림, 2007
칙센트미하이, <창의성의 즐거움>, 더난출판사, 노혜숙 역,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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