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자주 일컬어지는 단어 중 하나인 혐오에 대해서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혐오”라는 단어는 흔히 감정의 일종으로 인식되는데요, 비교적 최근 기사의 제목으로 오르내리는 “혐오”라는 단어는 단순히 감정적인 것을 넘어 조금 더 범위가 넓고 포괄적인 현상, 혹은 체제의 일부분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혐오를 단순히 감정이나 자연적인 반응으로 볼 때 놓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고의 흐름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혐오는 감정이다-혐오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혐오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에서 “자연스럽다”는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공유되고 있는가를 감지할 수 있는데요, 보통 자연스럽다는 단어는 좋음, 옳음, 선함, 정당함, 정상임, 심지어 도덕적이라는 윤리적 측면과도 연결되곤 합니다. 흔히 듣는 “자연스러운 것이 최고다”라는 말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지요. 반대로 “부자연스럽다”라는 단어와는 도덕적이지 못함, 잘못됨, 부당함, 비정상 등의 측면과 연결됩니다.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이지만, 이 두 단어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연”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선천적인 것, 언제부터나 그래왔던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자연스럽다는 말은 그렇게나 절대적인 것일까요?
첫 번째 사진의 중간 그림에서 보셨듯이 혐오(Disgust)라는 것은 분명 감정의 일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눈이 좁아지고, 콧구멍이 좁아지고, 입이 다물어지는 것과 같은 얼굴의 특징적 변화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지요.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혐오는 감정이 아니다가 아니라, 혐오는 분명 흔히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감정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맞지만 그 “자연스럽다”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이나 반대로 혐오되는 대상들은 어떤 차별적 구조나 권력에 의해 역사적으로 바뀌어왔다는 것입니다. 조금은 일차원적일 수 있지만 어쨌든 직관적인 예를 두 가지 찾아볼 수 있는데요. 두 예시 모두 흔히 “자연의 섭리가 아니다”라는 말로 비판 받는 성소수자성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첫 번째 예는 자연과 문명으로 나뉘었을 때 자연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따라서 “자연스럽다”는 범주에 속하는 펭귄의 예입니다. 독일 브레머하펜 동물원에서 멸종위기 1종으로 지정돼 있는 훔볼트 펭귄 수컷 두 마리가 10년 이상 교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펭귄들 외에도 수백 종의 동물들이 동성애 습성을 보이며, 이는 자연스러움을 기준으로 동성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두 번째 예는 고대 그리스의 예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물론 여성을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좋기만 한 이유에서는 아니었지만-남성과 남성간의 사랑을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와 관련되어 사랑을 주 동력으로 하는 남성만으로 이루어진 군대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는 남성 간 사랑이 신성한 것으로 생각됐던 만큼,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어쩌면 신의 섭리로) 여겨지고, 여성과 남성간의 사랑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예들로 볼 때 혐오의 대상과 자연스러움의 대상은 사실 대중, 혹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 익숙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혐오는 근본원인이 아니게 되는 것이죠. 혐오라는 감정이 자연스럽게 선천적이고 절대적인 거라서 혐오감이 들만한 대상을 볼 때 응당 혐오가 드는 것이 아니라, 기저에 이미 사회적으로 구성된 차별적 구조 혹은 체제가 자리 잡혀있고 그를 바탕으로 혐오하는 감정이 작동하여 그것이 차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차별은 다시 차별적 구조를 공고히 하는데도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악순환인 셈이죠.
발표를 준비하며 참고한 논문에서 직접 인용을 해보자면, “혐오대상은 특정집단이 자신들 내부의 통합을 도모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해 온 정치, 역사, 사회적인 인위적 구성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혐오라는 것은 타자(약자)에 대한 차별을 통해 내부통합을 도모하는 것으로, 이는 내부통합을 도모하는 집단이 그 집단의 본질을 정의할 수 없어 불안정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외부를 공격함으로써 해소하고 내집단을 어떻게든 정의하고자 시도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정상”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도 정상이 무엇인지는 정의할 수 없지만,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어 차별하려는 사람들은 본인이 정상의 범주에 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을 비정상이라고 낙인 찍고 외부화하며 혐오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혐오와 권력구조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렇게 혐오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현실적인 예를 듦과 동시에 한 단계 더 나아가, 역차별이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한 개념인지를 남성혐오의 예를 들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혐오”의 영역이 조금 더 넓어져, 그야말로 감정의 차원을 넘어 약자들이 구조적으로 차별 받아왔다는 학술적 의미로 쓰일 수 있음을 미리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구조가 존재해왔습니다. 앞서 언급됐듯이 여성은 역사적으로 인간취급 받지 못해왔고, 엄밀한 의미로는 현재에도 남성만이 진정하고 완전한 인간으로 여겨지는 구조적, 의식적 차별들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상황과 맥락 속에서 “남성혐오”라는 말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남성혐오라고 이름 짓는 순간 그것이 여성혐오와 같은 무게와 같은 깊이를 담고 있다고 잘못 전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구조는 평등하지 않고 기울어져있었으며, 이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기울어진 운동장 위 시소의 독백을 나타내는 밑의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기울어진 위에서 형식적 평등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게 참된 평등으로 인정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남성에 대한 (감정적)혐오적 표현은 이미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거대하고 공고한 체제 속 작은 균열에 불과하며, 단지 이러한 표현들을 한다고 해서 그 체제나 구조가 전복될 가능성도 없습니다. “남성혐오”라는 워딩은 위계를 마치 여성혐오와 남성혐오가 동일한 무게를 가진 것처럼 대칭으로 위장하는 것이며, 그 둘의 근본적 차이는 “약자에 대한 비하, 혐오 및 차별”과 “반응적/감정적 분노”입니다. 따라서 저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했을 때, 또 역차별적이라고 보이는 행동이 실제 원래 있던 “차별적 구조”를 변화, 전복, 해체할 힘 혹은 가능성이 있는가를 고려했을 때, 역차별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남성혐오라는 워딩 대신 “여성혐오에 대한 혐오”라고 바꿔 칭하는 것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혐오는 사회적 권력구조, 체제와 깊은 관련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극복을 위해서는 개개인의 노력과 힘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마사 누스바움이라는 법철학자에 따르면 혐오의 극복을 위해서는 “존중과 공감을 통한 인류애의 확산”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다른 이들을 비하하며 차별하기 보다는 우리 모두가 한계와 약점을 지닌(지녀도 괜찮은)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타자를 자신과 같은 입장에 놓고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바탕으로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공감대를 넓혀가는 자세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르며, 함께 살아가는 소수의 가족 구성원이라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누리는 권력은 각각 다릅니다. 나이, 성별, 학력 등에 따라서 말이죠.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도 못한 부분에서 약자로서 차별 받고 혐오 받는 사람의 마음을, 그러한 사회의 단면을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무슨 “말”도 못하냐, 겨우 “그런 걸” 갖고 그러냐 등의 얘기를 하는 순간 그 “말”이나 “그런 것”이 누군가에게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위협이 되는 것이 아닐는지, 내가 잘 모르고 혹 거만하게 얘기하는 것이 아닐지 모두가 한번쯤 더 곱씹어보고,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것에 대해 훈계를 하기 보다는 우선 들을 줄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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