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제가 할 얘기는 어마어마하게 대단하다거나 흥미로운 관점은 아닙니다. 그냥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불편함에 관한 스토리입니다. ‘해빈이의 일기’ 정도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들에는 불편함이라는 속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프로불편러” 같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단순히 어떤 사물이나 상황만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편해하는 누군가를 불편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불편함의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서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상대방이 느끼는 불편함이 일치하지 않을 때 “너 왜 이렇게 예민해. 네가 그러는 게 더 불편해.”가 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편함에 관한 저의 얘기를 꺼내는 것도 망설였습니다. 누군가는 제 얘기를 듣고 불편하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이 지나가고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 정말 우연히 여성학 학회에 가보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상태라 여성학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과 선배들이 맛있는 술을 사준다고 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 학회를 처음 갔던 날이 스무 살 중에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페미니즘이 이슈가 되는 세상도 아니었고, 저는 여성스러움이 무엇이고 남성스러움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한 번도 깊이 생각 해본 적 없기 때문에 너무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옷을 살 때 ‘이건 여성스러운 스타일의 원피스야.’라는 등의 말을 자주 했는데 ‘이런 말도 쓰면 안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새내기이던 2015년엔 미디어 속에서 탱글녀, 베이글녀와 같은 워딩들이 지속적으로 재생산 되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그런가 보다.”하고 넘겼던 단어들이 다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고등학교 때보다 제 삶의 영역이 넓어졌기 때문에 제가 불편함을 느끼는 대상들도 엄청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여성학을 공부한다고 할 때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같은 과 다른 선배가 “너 그 학회 나간다며? 재밌어? 거기는 좀…”이라고 말 할 때 “저는 괜찮은데요.”라고 말했지만 저조차도 ‘지금 내가 느끼는 불편함들이 굳이 내 인생에 필요한 불편함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사회 속에서 여성이나 남성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저를 계속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그 학회는 딱 두 번만 가보고 더 이상 가지 않았습니다.
반수 후, 다시 한 번 새내기가 된 저는 여러 가지 불편함에 대해 거리를 두고 살았습니다. 제 삶도 술먹기, 여행, 과제와 시험 정도로 단순했습니다. 술자리에서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말들이 나올 때도 가끔 있었지만 그냥 “너 그렇게 말하면 대숲에 올라가겠다.”정도로 웃으면서 넘겼습니다. 하나하나에 불편해하지 말고 적당히 맞춰 살자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젠더 관련 수업도 한 학기에 하나 정도 듣기는 했는데 제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스무 살 때 겪었듯이 너무나도 힘들고 피곤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 다시 배우고, 얘기하고,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들은 ‘잊고 살았던 게 진정으로 편한 것이었나?’라는 것입니다. 이번 학기에 ‘젠더와 법’ 수업을 들으면서 오히려 무지하기 때문에 노출되는 폭력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젠더와 법 수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강간죄 조항이었습니다. 강간죄는 젠더 문제와 관련해 굵직굵직한 변화를 거쳐왔는데 간략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1995년에 정조에 관한 법률에서 강간〮추행에 관한 법률로 바뀌며 강간죄의 보호법익이 성적 자기결정권이 되었습니다. 여성의 고소가 있어야지만 범죄로 취급되었던 강간죄에 관한 친고죄 조항은 2013년에 폐지되었습니다. 또한 강간죄의 내용을 살펴보면 2012년 이전까지는 객체가 ‘부녀’로 되어있는데 실정법적 해석상에서 부녀는 태어날 때부터 XX염색체를 지닌 여성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트랜스젠더나 성적 자기결정권의 형평에 있어서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2012년, 강간죄의 객체가 ‘부녀’에서 ‘사람’으로 바뀌면서 sex를 기반으로 한 법집행이 gender를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여성의 정조를 강조하고, 피해자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압박했으며, 생물학적 성별 기반의 사고를 해왔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직까지 문제가 되는 부분은 ‘최협의폭행협박설’입니다. ‘최협의폭행협박설’이란 강간죄 성립요건 중 폭행협박에 있어서 그 수준을 굉장히 강도 높게 설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항거가 불가능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만 강간죄가 성립하는데, 문제는 여기에서 피해자 또한 죽을 위기를 무릅쓰고 저항을 해야 성관계에 합의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죽을 위기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마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머리맡에 은장도를 두고 잤던 조선시대를 연상시키는 논리구조였습니다.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성적자기결정권인데 언어에 의한 거부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성적자기결정권에 관해서 너무 좁게 해석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성적자기결정권에서 보다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부분은 나의 결정이지, 결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협의폭행협박설’ 같은 기준 때문에 “허리를 돌려서 피해야지.”라는 말이 검사의 입에서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에게 법은 완벽, 완전, 정의로움, 합리적인 것의 총체였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공부를 해나가며 “법을 완벽하고 합리적인 것의 총체라고만 여겼던 나의 생각이 둔감함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어요. 사실 법이란 누군가 만든 것이고 판단하는 사람도 한정적입니다. 누가 제도를 세우고 판단하느냐의 문제겠죠. 예를 들어, 음란물 제작으로 잡혀간 마광수 교수에 대해서도 “좀 더 젊은 재판관이 봤으면 다른 판단이 나왔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거나 미국에서는 옛날에 “포르노그래피인지 아닌지는 판사인 내가 보면 안다.”는 말이 있었어요. 사실 음란함 판단은 ‘일반인의 사회 의식’을 기반으로 하지만 위의 예시들을 보면 그 일반인 개념은 굉장히 허상적인 것입니다. 동성애에 관해서도 이성애자를 일반적인 사람으로 전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상과 비정상은 누가, 왜 나누느냐의 문제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합리적이고 완전함을 가장하던 저의 세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불편한 감정은 법에 대해서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 같았으면 필력도 좋고, 재미있어서 즐겁게 읽었을 만한 책이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라는 소설입니다. 소설 속에서 남자주인공 루드비크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강간하려고 하다가 실패합니다. 하지만 그 자는 자신을 더 처량하게 만들고, 더 아름답게 만들고, 더 슬픈 존재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사랑에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그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부당하게 추방 받아서 분노하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부당하게 대우하고,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를 경멸하지만 자신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해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면서 이미지를 씌워버립니다. 소설에서 이런 것들은 하나도 문제시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루드비크의 성장 과정쯤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쓰여진 작품에 관해서 불편해하는 것이 이상하고 피곤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모든 텍스트는 영원히 열려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상과 비정상, 완벽한 진리라는 견고한 틀이 부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에 평등한 시각을 바라기도 어렵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읽으면서 회의감이 계속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니체가 위대한 사상가라고 여겨지고, 저도 그렇게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의 사상이 인간 존재의 주체성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위의 구절들을 보는 순간 “니체가 말하는 인간은 굉장히 한정적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튼, 이런 불편함을 겪으며 제가 내린 나름의 결론은 이 세상을 바꿔야지 같은 거창한 생각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설득할 마음도 없고, 설득이란 것은 너와 내가 동등할 때 이루어지는 것인데 설득이라는 표현 자체가 가능한 사회 구조인지도 의문이 듭니다. 저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제가 가진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고 그 무게를 견디는 것입니다. 제 세상의 완벽성을 의심하고 회의해서 제 자신이 바로 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편하고 예민하게, 날을 세우는 것은 적어도 저에게 나쁘지 않습니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라는 단편으로 저의 관점공유를 끝낼까 합니다. 이 소설에서 법의 문을 통과하고 싶었던 시골 사람은 문지기한테 문을 열어달라고 말하고, 회유하고, 매수하지만 결국 문을 열지 못합니다. 문지기의 존재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법이라는 문과 법을 지키는 문지기는 무척 견고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법의 문턱을 진정으로 넘고 싶었다면 문지기를 한 대 쳐서 쓰러뜨리고 문을 열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고, 완벽한 진리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두드려서 부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불편함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얘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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