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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s/DEMA Talks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 양희주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안녕하세요, DEMA STUDIO 양희주 Eyes입니다. 이번 DEMA TALK에서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해요.  여러분은 어떤 영화 좋아하시나요?



저는 영화를 좋아해요. 영화를 제대로 즐겨보기 시작한 건 20살이 넘어서부터 였어요. 이대 안에 위치해 있는 아트하우스 모모나 연대 동문 앞의 필름포럼, 광화문 씨네큐브라는 영화 공간과 여기서 상영하는 영화들을 좋아해요.  쉽게 말해서 흔히 예술 영화관이라고 불리는 곳에 기웃거려 왔다고 할 수 있죠.


근데, 어느날 친구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너는 이런 영화가 왜 좋아?  사실 재미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해가 잘 안되서 공감하기 어려울 때가 많잖아.”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왜 이런 영화 공간을 좋아하고, 또 여기서 다루는 영화들에 관심을 갖고 있을까?’ 라는 질문이 떠올랐고,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 내가 모종의 허세를 부리고 있었나?’ 였어요. 근데 이것도 어느 정도 맞는 거 같더라구요. 아예 없지는 않았어요. ‘나는 이런 영화를 좋아해’라고 말하면서 예술 영화를 향유하는 주체로 스스를 정체화하는 순간에 느끼는 모종의 기쁨이 분명히 있었던 것이죠.



근데 한편으로는 분명히 이런 감정 만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좀 더 고민해보았죠. 그러던 중 작년 가을에 우연한 계기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자유의 언덕>을 보게 되었어요. 홍상수 감독 영화를 두번째로 접하게 되었죠.


처음 홍상수 영화를 본 건 몇 년전 아트하우스 모모 에서 였어요. 그때 ‘북촌방향’을 보고는 꽤나 충격을 받았죠.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제게는 너무 심각하게 지루한 영화였어요. 무엇인가 웃음코드가 있는 듯 했지만 감지할 수 없는 듯 했고, 영화의 맥락도 굉장히 당황스러웠어요.  평소에 예술 영화관이라고 불리는 곳에 나름 기웃거려 왔다고 생각했는데, ‘홍상수 영화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이 감독의 영화는 그 때부터 사실 피해다녔었는데, 작년 가을에 우연한 기회로 다시 홍상수의 영화를 보게 되었지요.



영화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몸이 아파서 일상을 포기해야 했던 권이라는 어학원 강사가 등장해요. 권은 산에 들어가 요양을 한 후 몸이 회복되어 서울로 돌아오게 되고, 일하던 어학원에 다시 들려요. 그곳에서 권에게 보내진 두툼한 편지 봉투 하나가 있다는걸 발견하고, 그 편지를 받으면서 영화가 시작해요.


이년 전 모리라는 일본인 강사가 권에게 구혼을 한 적이 있어요. 권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그 다음날 거절했어요. 모리는 그 직후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모리가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권을 찾아요. 한편 권은 모리의 편지를 받은 후 어학원 로비에서 한 장을 읽고, 밖으로 나오기 위해 어학원 계단을 내려오다가 갑자기 현기증으로 쓰러져요. 그때 손에 들고 있던 편지들이 계단 밑으로 떨어지죠. 그렇게 흩어진 편지들을 주으면서 권은 편지들에 날짜가 없음을 발견하고, 권은 편지들이 쓰인 순서를 정확히 알 도리가 없게 돼요. 영화는 그렇게 뒤섞인 편지들의 흐름 대로 이후의 장면들이 구성됩니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요소는 감독의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요.  시간은 시각적, 청각적이거나 후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인간은 시간을 감지할 수 있는 특정한 기관이 없어요. 그럼에도 우리는 ‘시간이 참 빨리 간다’ 라는 식의 언어를 사용하곤 하죠. 우리는 시간을 온 몸으로 느껴내는 거에요. 구체적인 형상으로 현실에서 포착할 수 없지만 시간은 우리가 온 몸으로 느끼듯 그 어떠한 감각보다 강력하게 우리를 사로잡아요. 홍상수 감독은 ‘자유의 언덕’에서 이렇게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시간’, 또 한편으로 영화라는 예술 매체의 기본 전제로서의 ‘시간’을 배제하는 시도를 해요. 시간으로 시작하고 완성되는 시간의 예술인 영화에서 그가 이것을 배제한 방식과, 또 이 자체로 홍상수가 관객에게 던진 상상의 여지를 읽을 수 있었어요.



큘레쇼프는 20년대 소련 무성영화 형성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영화감독이자 이론가인데, 소련에서 몽타주 이론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에요.


쿨레쇼프 효과는  쿨레쇼프가 주창한 쇼트 편집의 효과입니다. 그림에서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어요. 먼저 관객에게 남성의 중립적인 표정을  보여준 후 한번은 관 속에 사람이 누워있는 걸 보여주고, 한번은 음식이 담긴 접시를 보여주고, 또 한번은 누워있는 여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장면을 각각 다르게 본 관객들에게 배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물었더니  관에 사람이 누워있는 장면을 본 관객들은 그의 표정이 죽음에 침통한 표정이라고 했고, 음식 장면을 본 관객은 배가 고픈 표정이라고 했고, 누워있는 여성을 본 관객은 여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을 갖고 있는 표정이라 말했다고 해요.  결국 이것은 각각의 이미지에는 담겨 있지 않은 의미를 관객이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화적으로 설명하면 의미라는 것은 하나의 쇼트에 있지 않고 여러 개의 쇼트들이 연합할 때, 그 관계 맺음으로부터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지요.


자유의 언덕은 쿨레쇼프 효과를 깨트려요. 개별적인 쇼트들이 엮어진다 하더라도 어떠한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내지 못하죠. 이것은 각각의 쇼트들이 시간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홍상수 감독이 제시하고 있는 쇼트들은 각각 시간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쇼트들이 배치 되어도 미래 혹은 과거, 현재라는 시간을 상상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결국 자유의 언덕은 유기적으로 어떠한 시간성을 말해주지 못해요. 뒤엉킨 쇼트들의 시간 때문에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수준의 인과관계가 깨져버린 것입니다.




앞서 말한 쿨레쇼프의 영화 편집 문법으로 몽타주 이론을 영화의 미학적 원리로 완성시킨 사람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에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쇼트는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해요. 각각의 쇼트들은 새롭게 감독에 의해 배치되면서, 앞 뒤 쇼트와의 관계와 맥락으로부터 비로소 의미가 발현된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촬영보다 더욱 핵심적인 행위는 감독의 후반 작업인 편집에 있다고 주장해요. 그는 쇼트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대한 맥락으로 몽타주 이론을 제시했고, 쇼트들의 결합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끌어내는 작업을 시도했어요. 이러한 몽타주 문법은 에이젠슈타인을 시작으로 하나의 결을 형성하면서 영화적 표현 방식으로 자리매김했죠.



홍상수는 이 영화에서 에이젠슈타인의 문법을 따르지 않았어요. 대신 자유의 언덕에서 몽타주를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접근시키고 있어요. 영화 첫 부분에서 권은  모리가 쓴 편지 뭉치를 계단에서 놓치게 되면서 편지를 흩뜨리지요. 권은 순서가 뒤엉킨 편지들을 하나씩 주어가고 영화는 그렇게 뒤엉킨 편지들의 흐름을 따라 가게 되는데, 이 이후의 쇼트들은 순서가 뒤섞인 편지처럼 앞 뒤의 관계나 맥락이 고려되지 않은 듯 배열돼요. 서로 이질적인 쇼트들의 관계를 통해 어떤 맥락을 이끌어내었던 에이젠슈타인의 시도와는 다르게, 독립적인 쇼트들이 합쳐져 어떠한 새로운 개념을 도출한다기 보다 완전히 갑작스럽고 엉뚱한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자유의 언덕은 시간성이 깨진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영화의 주요한 미학적 원리 역시 깨트리죠. 자유의 언덕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시간을 잃어버린 퍼즐을 다시 원래의 완벽한 그림으로 맞추듯이 부단히 노력하게 되지요. 관객은  어떻게든 어지럽혀진 쇼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이 배제된 쇼트들을 다시금 순차적으로 엮으려고 하면서 시간성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자유의 언덕은 관객이 시간을 꿰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이러한 모종의 본능적인 혹은 학습된 사고행위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It says time is not a real thing, like your body and my body or this table. A brain makes a mine frame of time continuity past present and future. I think we don’t have to experience life like that, necessarily as a species, but at the end we cannot escape from this frame of mine, because our brain evolve this way. I don’t know why.” <자유의언덕>中


감독은 모리의 대사를 통해서 자신이 던지고자 했던 질문을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요. 시간은 실체가 없고 오로지 우리의 뇌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틀을 만들어 낸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죠. 모리가 하는 이 대사는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시간성이 배제된 쇼트들을 제시하면서 감독은 관객에게 체화된 근대의 시간성에 질문을 던지고 있지요. ‘우리가 시간을 측량하고 경험해 내는 데 있어 과연 스스로 생각하는 것 만큼 합리적일까?’

모리가 극중에서 경험하는 상황과 대사는 인간이 시간을 감당하는 것에 있어서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시간을 비현실적으로 재구성하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권을 찾아다니는 모리처럼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비합리적으로, 자의적으로 시간을 기억해내지요. 마치 뒤섞여버린 모리의 편지처럼 말이죠. 자유의 언덕은 쇼트의 배치, 그 자체로 인간이 스스로 가정해놓으며  믿고 살아가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맥락을 뒤엎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 입니다.



영화를 하나의 예술 매체로서 자리매김하는 데에 쇼트 분할과 카메라 움직임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하지요.  그 이유는 단순히 영화가 순간을 찍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쇼트를 분할해서 그것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카메라를 이동시켜 찍을 것인지에 따라서 감독의 생각이 개입하고 드러날 수 있는 여지가 확대되었기 때문일 거에요.  예술이라는 것은 작가가 세상에 지속적으로 말을 거는 행위라고 생각하기에 작가가 자신의 작품으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는 여지가 확장된다면, 그것은 예술로서 기능할 수 있는 기회의 확대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영화가 단순히 소비되는 것이기보다 독립적인 하나의 예술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감독의 끊임없이 말을 거는 행위가 담겨야 하지 않을까요?

더나아가 예술로서의 영화는 관객의 사유를 건드리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다고 생각해요. 익숙한 것을 다시금 사유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거죠. 이것은 곧 영화 예술이 관객에게 ‘성찰’의 가능성을 줄 수 있음을 의미해요. 여기서 성찰이라는 것은 기존의 지배적인 시각에서 조금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 혹은 스스로를 거리두고 보는 것 부터를 의미하죠.

자유의 언덕은  이런 지점에서 예술로서 기능했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에게 체화된 선형적 형태의 시간성에 대 질문을 던지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 시간이 어떤 형태로 구성되고 움직이는지 말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한편으로 의문이 생기는 지점도 있어요. ‘이 영화가 완전히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더불어 ‘인간은 시간이라는 체화된 감각을 제대로 거리두고 볼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하거나 굉장히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홍상수 감독도 이 영화를 찍을 때 먼저 시간 순으로 찍고 나서 쇼트들을 섞었다고 하니까, 감독조차 이미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인 것이죠. 그렇다면 홍상수 감독이 자유의 언덕을 통해 제기한 물음, 이러한 시도는 그저 무의미한 것으로 끝나버리는 걸까요?



감독 스스로도, 우리도, 시간의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감독이 물음을 던지는 이러한 일련의 행위 자체가 충분히 새로운 물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앞서 예술로서의 영화가 관객에게 ‘성찰’의 가능성을 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홍상수는 현대인들에게 과잉 시간화된 삶을 되돌아 볼 67분의 시청각적 기회를 제공해준 거에요. 그렇다면, 성찰의 기회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의 삶에서 ‘성찰’은 스스로에게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중요한 기제라고 생각해요.  ‘매몰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으로 자기 억압 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하는 것을 말해요. 그렇기에 매몰되지 않는 삶은 더 나아가 인간이 진정으로 타인과 함께 소통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생의 장’을 형성할 수 있어요. 특정한 잣대로 남을 평가하거나, 괴롭히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다름을 건강한 방식으로 인정할 수 있는 태도가  갖춰져 있는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러한  ‘공생의 장’이 더욱 확장되어 갈 때 서로 들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언어만 내뱉는 지금 이 시점의 사회에서 공생의 질서를 회복시켜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저는 예술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좋아해 온 이유가 우리의 사유를 사유케 하는 영화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인 거 같아요. 이처럼 우리에게 말을 거는 영화들을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향유했으면 좋겠고, 이를 통해 우리들의 소통 영역이 더욱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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