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늦게나마 인사드립니다. 저는 지난 8월부터 DEMA 가족이 된 형지현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성약설’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성악설 아니고, 성’약’설입니다.
이 이론이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어낸 이름이니까요.
보통은 말이죠, 우리는 인간이란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부터 이 생각을 조금 비틀어보고자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떠올리는 ‘이기적’의 정의가 동일해야 합니다. 따라서 제가 간주하는 이기적인 행동의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볼게요.
소모적인 전쟁 일으키기.
조모임의 프리라이더.
길바닥에 쓰레기 버리기.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지만 버스 안에서 햄버거 먹기.
공통점을 찾으셨나요?
저는 이 글에서 ‘이기적’의 의미를 타인에게 피해가 갈 것임을 인지하면서도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로 정의할 것입니다. 물론 각자가 생각하는 ‘이기적’의 다양한 범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저의 관점을 공유하는 글이므로,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동안에는 이 정의를 숙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과연 진 ! 짜 ! 로 ! 인간의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일까요?
아주 오래전, 대륙의 현자들께서도 이에 대해 각자 한 마디씩 하셨었습니다. 순자 선생님께서는 인간은 본래 타고나기를 악하게 태어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한 인간에 대해 이건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보셨습니다. 반면 맹자 선생님께서는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행동 밑바닥에는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깔려있다고 생각하셨죠. 그런데 왜 우리는! 흑과 백을 나누듯이 인간의 성품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걸까요? 혹시 이와 같은 구분짓기가 우리에게 편안하게 인지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성약설을 주장합니다. 인간은 선하거나 이기적이기 이전에 나약합니다. 이 때 나약함은 손실 및 피해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개인이 스스로의 나약함을 이겨낸다면 선한 행동이 발휘됩니다. 그러나 이겨내지 못하고 손실을 회피한다면 이기적인 행동이 발휘됩니다. 이 생각은 내가 손해를 보지 않으면 타인이 손해를 보게 되는 상황을 전제합니다.
성약설도 나름 하나의 이론이라서, 세 가지의 기본 가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선택’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인간은 ‘나약함’을 지닌 채로 두 가지 갈림길에 섭니다. 선한 행동과 이기적인 행동. 인간은 둘 사이에서 자신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실이 두려워’ 갈등합니다. 그렇다면 갈등하지 않는다면 이기적인 존재일까요? 따라서 두번째 가정이 필요합니다.
둘째. 인간은 후천적으로 선에 대한 분별을 할 수 있다.
갈등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결정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인지는 후천적으로 그가 속한 문화, 혹은 삶의 여정에서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만약 인지하는데도 갈등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기적일까요? 저는 이에 대해 이기적인 선택이 익숙해져 그에 대해 무뎌졌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이 사람은 너무나 나약해져 더 이상 그러지 않으려는 노력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셋째.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을 선호합니다.
이 말이 성선설과 비슷하게 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엄연히 차이가 존재합니다. 성선설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하게 행동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문장은 인간이 단순히 선을 좋아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을 선호하는 이유는 말하자면, ‘좋은게 좋은거니까’ 입니다. 성품때문이 아니구요. 가령 어린 아이는 엄마가 웃으면 따라서 웃습니다. 왜냐하면 웃는 것은 좋은 것이니까요.
몇몇의 예리하신 분들께서는 이 가정들을 뒷받침하는 실증적 근거가 굉장히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로 저의 개똥철학만으로는 설득력이 다소 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Jonathan Haidt 씨의 연구로부터 도움을 받아보겠습니다. 그는 실증적으로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 연구한 사람이므로, 그의 발견을 통해 2번과 3번 가정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다소 까다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을테니 잔뜩 긴장해주시길 바랍니다. 우선 위의 이야기를 읽어주세요. 그리고 대답해주세요. 마크와 줄리가 성관계를 가진 것은 잘못된 행동이었나요?
사실 이 이야기는 실화는 아니고, Jonathan Haidt가 <바른 마음>이라는 저서를 통해 언급한 사례입니다. 그는 이 사례를 가지고 다음과 같은 가정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 인간은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즉각적이고 감정적이다. ‘
즉, 인간의 도덕적 판단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이는 성악설과는 구분됩니다. 성악설은 ‘사리 분별’을 통해 도덕에 대해 판단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성선설과도 아주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성선설은 처음부터 인간은 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결국 인간은 육체적이고 감정적으로 ‘선이 더 좋다’라는 것을 인지하지만, 그러한 감정과 연결되는 ‘무엇이 선이느냐’라는 것은 후천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지요.
아주 재미있는 것은, 이 실험에서 피험자들의 20%를 제외한 사람들은 이를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을 내린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 줄 것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설명에 이의를 제기하자, 아주 혼란스러워 하며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판단을 바꾸지 않지요. 스스로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감정이 강하게 발휘되는 것입니다.
(* 그는 이처럼 타인에게 딱히 피해는 주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이유를 찾는 것은 힘들지만, 즉각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이와 같은 상황들을 ‘무해한 금기 이야기’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바른 마음>이라는 책을 뒤적여 보실 것을 권합니다. )
이와 같은 발견들을 가지고 Jonathan Haidt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습니다.
‘ 인간은 상황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내린 이후에 이를 정당화하고자 도덕적 추론을 한다. ‘
우리가 평소 알고 있던 메커니즘과는 아주 상반될 것입니다. 보통은 여러가지 근거를 통해 추론을 한 후 이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과정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졌으니까요. Haidt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하는 순간은 아주 감정적이고 직관적이라고 합니다. 앞서 언급된 가정 3에서 처럼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을 선호하고, ‘선’이 아닌 것을 보았을 때는 역겨움에 가까운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내린 도덕적 판단을 정당화하고자 본격적으로 그 이유들에 대하여 추론하는 과정에 돌입하는데, 이 순간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입니다. 이는 앞서 언급되었던 가정 2에서와 같이 무엇이 선이느냐에 대한 분별 자체는 후천적으로 형성된다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후천적으로 어떻게 형성되느냐? 이는 그가 속한 문화에 따라 결정됩니다. 위의 그림에서 큰 원 안에 들어 있는 세 가지 작은 원은 도덕적 기준을 결정하는 가치들입니다. 그리고 이 가치들은 그 문화에서 중요하게 생각되어지는 가치들이기도 합니다.
가령 ‘공동체의 윤리’라면, 공동체적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해치는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판단합니다. 또 ‘자율성의 윤리’라면, 개인의 자유 및 가치관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침해한다면 도덕적으로 어긋났다고 판단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성함의 윤리’라면, 종교적 차원에서 인간을 신의 아들로 간주하고, 그에 맞는 거룩하고 순결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바라봅니다.
그래서 끝으로! 성약설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이 때 ‘용기 있다’라는 것은 스스로가 가진 본래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손해를 조금은 감내할 수 있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잡아먹히지 않고 타인을 위해 조금은 양보하는 용기있는 사람들의 사회가 성약설이 그리는 바람직한 세계관이구요.
때로는 타인의 이기적인 모습에 ‘역시 인간이란 존재는…’이라면서 그 사람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저 그 사람은 아주 나약했을 뿐이니까요.
차라리 두려움이 너무나 커서 이기적인 결정을 내린 그에게 용기를 전해주는 건 어떨까요. 나의 용기있는 모습을 통해서요.
또한 잃을 것이 두려워지는 선택의 순간에, 조금만 더 용기를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조언같은 제안을 하는 것이 굉장히 건방져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제가 가장 전하고 싶은 메세지였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담으로 제가 왜 이런 개똥철학을 가지게 되었는지 덧붙이고자 합니다.
20살은 저에게 있어 아주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관점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는 순간들을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성선설을 지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보는 세상은 평화로웠고(간간히 들리는 전쟁 소식만 제외한다면), 제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습니다. 다들 착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선한 사람들이 어린 제가 바라보는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두 가지 환경적 요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째는 가정교육. ‘사람들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되며, 그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언제나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셨고, 그 말을 저는 아주 착실히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어렸을 땐 비판의식 같은 게 거의 전무했습니다. 모든 것을 좋게 바라보았고, 어른들 말씀을 열심히 귀담아들었고, 친구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나쁜 것들’을 차단하고 회피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두려워서였을 수도 있고, 단순히 싫어서였을 수도 있고.)
둘째는 주변 환경.
운이 좋게도(?) 제 주변에 저에게 태클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학창시절에 친구와 다툰 적도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거기다 저에게 상처주는 사람도 없었고, 친구들도 다 순둥순둥한 친구들이었고, 부모님께서는 제 말에 잘 귀기울여 주셨기 때문에 부딪힐 일도 없었고, 위험한 환경에서 살고 있지도 않았죠. 집이 경제적으로 어렵지도 않았으며, 저는 공부에만 집중하면 됐었고, 공부는 적성에 잘 맞았고, 학교에서 선생님과의 관계도 원만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오는 갈등 상황에 놓일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선한 인간’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12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두 가지 사건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첫째. 중간고사 때 친구에게 필기 노트를 보여주지 않은 스스로를 발견한 사건.
아무 이유없이 친구에게 수업시간에 필기한 노트를 보여주지 않은 저를 발견했을 때. 분명 잘못된 행동인 줄 알면서도, 노트 보여주는 것쯤이야 별거 아닌 줄 알면서도 저는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기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았죠. 선하고 배려심 많은 줄 알았던 나는 뭐하는 닝겐인가..
둘째. 남자친구와의 갈등. 2012년에 저는 제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요, 바로 지금도 투닥투닥 잘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입니다. 이 남자친구는 저와는 달리 인간을 이기적이고 본질적으로 악한 존재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애가 아주 삐뚤어졌네…’라고 생각했었고, 남자친구와 인간은 선한지 이기적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설전을 해왔습니다. (남자친구가 아주 완강해서 여전히 진행중이지만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제 관점이 불완전한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바라 본 세상도 진실이지만, 남자친구가 바라 본 세상 역시 진실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주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선할까? 이기적일까?
그러다가 서서히 그 기저에는 뭔가 다른게 있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나약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노트를 보여주지 않았던 이유도, 상대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된 것이죠.
아무튼 여기까지가 제가 관점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 과정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이 지면을 빌려 개똥철학을 가지게 도와준 남자친구께 소소한 감사를 전하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참고도서: <바른 마음>, 조너선 하이트, 웅진지식하우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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