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DEMA studio eyes 배수민 입니다.
이번 dema talk 에서는 지금까지 항상 저를 괴롭혀 왔던,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보았을 ‘자기 혐오’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기초 대사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각자 섭취해야 할 영양분의양도 다르고, 필요한 운동의 양도 다릅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마다 고유한 기초 대사량이 있는 것처럼, 각자가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의 총량 역시도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통의 수용량이 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같은 스트레스를 좀 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고, 반대로 수용량이 작은 사람은 작은 스트레스에도 괴로워합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고통의 수용량이 매우 작은 편에 속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세상은 언제나 스트레스와 상처로 가득했습니다. 일상 속의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도 저에게는 너무나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거나 상처가 되곤 했습니다. 분명히 제 3자의 시선에서는 제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이 매우 사소하게 보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저는 걱정과 근심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작은 일로 인한 상처와 스트레스는 점점 더 불어났고, 이는 더 큰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좁은 통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부정적인 생각들은 겉잡을 수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끝은 언제나
'나는 왜 이럴까?'
'내가 잘못되어서 그런거야'
와 같은 자기혐오로 끝났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나는 왜 이럴까’ 라는 질문과 정면승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던 지난날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가히 길다고는 할 수 없는 22년간의 삶 속에서 제 내면을 가장 많이 뒤흔들어놓았던 두 가지 사건을 꼽자면, 하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였고, 또 다른 하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했던 나의 행동들이 사실은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내가 멋지다고 생각했던 그간의 나의 모습들이 한 순간에 한심하고 부끄러워졌고,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도 감히 내가 좋아하던 그들을 함부로 대했다는 사실이 죄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도 저는 오롯이 그들을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타인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오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러한 고통을 그들에게 줄 권리가 나에게 있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혹여 나의 고통이 사소한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나의 잘못으로 인해 그들이 나에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게 아닌지 하는 생각들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생각해도 모든 일은 나 때문에 잘못되는 것만 같았고,
과거에 잘못되었던 나 때문에 지금의 내가 마음에 안 들고,
미래의 나 역시도 마음에 안 들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계속 힘들어하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위치’ 라는 책에 나오는 한 심리학 실험을 소개할까 합니다. 실험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사람들을 A와 B의 두 집단으로 나누어 A집단에는 달콤한 초코칩 쿠키를 주고, B 집단에는 무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두를 같은 방에 몰아넣고 각각 주어진 음식을 먹게 했습니다. B 집단은 A 집단의 쿠키를 부러워했지만, 어쩔 수 없이 무를 꾸역꾸역 먹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쿠키와 무를 다 먹고 난 뒤, 두 집단 모두에게 어려운 수학 문제가 주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B 집단은 A 집단보다 훨씬 빨리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무를 먹으면서 이미 충분히 고통 받았기 때문에, 수학 문제를 풀면서 받는 고통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 실험과 마찬가지로, 이미 내가 나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있기 때문에 다른 작은 스트레스도 감당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픈 것도 나고, 아프게 하는 것도 난데 왜 저는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지금의 제 모습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외부의 환경과 요구에 맞춰 나를 바꿔가며 제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즉, 변화를 위한 고통도 두렵고, 머물러 있는 아픔도 두렵습니다. 이렇게 저는 계속되는 모순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혐오가 시작된 가장 최초의 이유로 다시 되짚어 올라가면, 그것은 사실 매우 사소한 문제였습니다. 제가 너를 싫어하게 되는 거대한 대의들을 잘게 쪼개어 내면, 사실 말로 표현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작은 충격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습니다. 오늘 만난 친구의 표정이 뭔가 씁쓸해 보였다던가, 교수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던가, 또는 계획했던 일들이 생각한 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 저는 그것을 제 탓으로 돌렸고, 그것은 고통의 통발 속으로 점차 들어가 아픔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사소한 것이었는데 말이죠.
사는 건 어쩌면 영원 속의 한 순간 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 순간에 지배되어 우울해지기도 하고, 한없이 기뻐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영원의 순간 순간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 전체적 흐름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일은 그 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순간들이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일반화하여 파악하려고 드는 순간, 우리는 슬픔과 고통을 겪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흐름은 항상 변화하고, 우리는 그 단면만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 편의 영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크린 속의 주인공은 자신이 겪고 있는 장면 안의 상황만을 알 뿐,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영화관 좌석에 앉아 스크린을 보고 있는 관객들은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를 통해 주인공의 운명을 짐작할 수 있지만, 영화 안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관객들이 그러한 클리셰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주어진 상황에서 납득할 만한 선택을 하고, 고군분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존하지도 않는 허구의 인물을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제 자신 역시도 같은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의 한 장면같이 살고 싶습니다. 이제는 제가 주인공인 제 영화의 결말을 미리 보려 하지 않으려 합니다. 오히려 내가 한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자꾸만 다가올 다음 장면을 생각하고, 이미 지나간 이전 장면에 집착하면 되려 소중한 지금의 장면을 허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더 나아지지 못하는가' 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주어진 순간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영원 속에서 모든 것은 항상 변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의 상황이 변치 않길 원하기에, 앞으로 다가올 변화를 예측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게 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을 미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다만,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에 휩쓸리지 않도록 후회 한 점 없이 살고 싶을 뿐입니다.
제 자신이 지금 주어진 상황의 주체가 되어 진심을 다해 살아간다면, 제 영화 속에서 저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 순간들이 모이면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듯 조금은 감당할 만한 삶이 되지 않을까요?
언제나 영화처럼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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