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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국가폭력 - 김진혁

DEMA Studio 2018. 7. 11. 20:12



저의 관점공유 주제는 전쟁과 국가폭력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전쟁을 매개로 드러나는 국가의 압도적 폭력성을 직시하고 또한 고찰해보고 싶습니다. 이 논의의 중심소재는 1955년 발발하여 1975년까지 지속된 베트남전쟁(Vietnam war)입니다.


<1968년 2월 12일>(고경태 저, 한겨레출판)은 베트남전쟁 와중에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참상을 생존자, 목격자 및 가해자 인터뷰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르포르타주(reportage)입니다. 오늘의 관점공유는 베트남전쟁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과, 아울러 이 책에 등장하는 민간인 학살에 관한 증언을 바탕으로 구성해가고자 합니다.



베트남전은 20년간이나 지속된 총력전(Total War)이면서, 냉전질서 하에서 전개된 국제적 대리전의 성격을 가졌습니다. 쉽게 말해 자유주의 진영의 남베트남 정부-미국-한국 동맹과 공산주의 진영의 북베트남 정부-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간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조금 멀리서 보면 베트남전쟁은 국제정치적,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어리석으면서 비참하기까지 하며, 또 어리석기 때문에 더 비참해진 전쟁”(Gaddis, 2002: 319)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베트남전 당시 수십개의 마을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은 베트남전의 “어리석음”과 “비참함”, 나아가 전쟁 자체가 담지한 극단적인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줍니다.


민간인 학살의 구체적 발생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북베트남 정부의 “인민 전쟁” 방침에 따라, 북베트남 군은 정규군인 베트남인민군과 게릴라 비정규군인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이 모호해지자 미군과 한국군을 비롯한 남베트남 동맹군은 일정 구역에 민간인을 집단 수용하여 전략촌을 만들고, 그 이외의 지역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적으로 간주”하는 “자유 사격 지대”로 규정하였습니다.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은 이러한 미군의 전략에 따라 안전 마을로 분류된 곳이었고, 마을에는 남베트남 군의 가족들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베트남인민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은 1968년 구정 명절을 기하여 “구정 대공세”를 전개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남베트남 대다수 도시의 군사시설이 함락되었고, 압도적 승리를 자신하던 미군은 갑작스레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이에 미군은 구정공세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개시하였고, 파월국군 해병대 청룡여단 역시 반격작전인 괴룡 1호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작전 중이던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일대를 지나던 청룡여단 1중대는 퐁니, 퐁넛 마을을 습격, 70여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였습니다.


위의 사진들은 베트남전 당시 퐁니 퐁넛 마을에서 학살된 민간인 피해자들의 사진입니다. 장기간 지속된 전쟁은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진영 논리와 맹목적인 분노에 경도된 “어리석은” 판단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비참한”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힘 없는 민간인들은 영문도 모른채 그 속에서 쓰러져갔습니다.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청룡여단 1중대 2소대장 이상우씨의 증언은 퐁니 퐁넛 마을 민간인 학살이 전략적 확신이나 이성적 판단없이 분노 혹은 두려움에 의해 마구잡이로 자행된 사건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결국 희생당한 민간인들과 그 유족뿐 아니라 국가의 이해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전쟁에 동원된 군인들 역시도 구조의 피해자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아직도 상당수의 파월 군인들이 전쟁이 남긴 후유증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피해자들은 여전히 치유받지 못한 상처를 안은채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가해자인 정부는 이렇다 할만한 사과나 배상을 하지 않고있습니다. 정치적 계산보다는 올바른 역사인식을 앞세운 국가의 책임감있는 행동이 요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