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ssions/DEMA Talks

인간; 세상 - 이화니

DEMA Studio 2018. 7. 5. 17:15

이번 발표를 통해서는 제가 자신, 타인 그리고 사회를 이해하는 관점이 어떤 변화를 어떻게 거쳐왔는지 공유하겠습니다. 본격적인 공유에 앞서, 디마 소속멤버들 앞에서만 하는 발표와 달리 본 포스팅은 익명의 다수에게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발표 때 얘기한 내용들이 다소 축소되고 생략되었다는 점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저는 청소년기 시절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 말씀을 거의 절대 상위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어떤 일에서든지 ‘교훈’을 발견하려 노력하고, 어른들 말씀처럼 최선을 다해 자기계발을 하지 못함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어른들을 비롯한 타인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만사를 좋게 좋게 보려는 제 태도를 돌이켜보며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가 혹여 비판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는 더 이상 부모님 말씀이 청소년기처럼 절대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를 ‘세상이 말하는 정상성’이 차지했습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고, 당연히 ~해야 하며, 아무리 그래도 ~는 해야 한다는 식의 담론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저는 애써 미소 지으며 그 틀에 제 생각도 행동도 끼워 맞추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속은 답답해졌고, 내적 괴리감이 느껴졌으며, 애써 짓는 웃음들이 공허하고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저를 둘러싸고 있던 껍질을 깨고 나오게 해준 학문이 문화인류학입니다. 문화인류학을 배우며 제가 사회를 바라보던 견고한 시선을 무너뜨리고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화인류학을 배우며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페미니즘은 제가 고수하던 사고방식이 스스로를 얽매는 장치였음을, 세상에 당연하거나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그렇게 믿는 많은 것들이 사회적 구성물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 저는 더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더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체득하는 방식이 이론적인 영역-수업, 논문, 책, 강연 등-에 그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른 방법을 탐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중, 제 모교에서 방학 때 연기 아카데미가 열린다는 공지를 접했고, 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위 이미지는 감각, 사유, 치유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연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서술하라는 지원서의 질문에 제가 적은 답변입니다. 머리(이론)보다는 몸과 마음(적극적 역지사지)으로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려는 의욕이 가득한 상태에서 적었지만, 직접 경험을 하고 나니 당시의 제 생각도 여전히 머리에 갇혀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다른 배움의 방식이 다른 것을 완벽히 대체할 수 없으며, 서로 보완해나가야 한다는 의미겠죠. 그럼 앞으로 제가 짧은 연기공부의 경험을 통해 어떤 것들을 새로 깨닫게 되었는지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본인이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바를 확정해야 상대방에게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수업 초반에 몸을 풀어보는 활동-상대방 동작 최대한 동시에 그대로 따라하기-을 하면서 스쳐가듯 들었던 내용이었습니다. 강사님은 아마 당시에는 오직 그 활동에 국한하여 말씀하신 것이었겠지만, 저는 그 문장이 전반적인 삶의 자세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사람이 제 말을 정확히 이해하길 원한다면, 혹은 제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왜 전달하고 싶은지를 먼저 고민하고 확정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원하는 결과보다는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몸짓을 통해 이 점을 명확히 배울 수 있었고, 많은 웃음과 함께 제 삶의 지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같은 것을 봐도 사람들마다 다르게 느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밑의 대본을 보시죠.


굉장히 간단해 보이는 대본입니다. 오직 두 명의 인물, 짧은 대화들. 아마 각자 대본을 읽으면서 어떤 상황인지에 대한 대략의 짐작은 할 법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본인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나 분위기를 생각해내기도 합니다. 실제로 수업시간에는 이 대본을 바탕으로 아래같이 세 가지의 시나리오를 받았습니다.

1.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룸메이트가 꼭두새벽에 복도에서 마주치고 방에 같이 들어와서 나누는 대화

2.신혼부부의 싸움 끝에 한 명이 집을 나갔다가 아침에 돌아온 뒤 나누는 대화

3.서로 호감이 있는 고등학생 둘이 식당에서 같이 앉게 되어 나누는 대화

놀라웠던 것은 여기서도 더 세분화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나름 구체적인 시나리오가 짜인 이상 다 비슷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될 줄 알았는데, 같은 시나리오를 맡은 팀들마다 연출하는 느낌이 모두 달랐습니다. 이와 같은 활동을 통해 “사람들은 모두 다른 것을 보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명제를 보다 감각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은 문학작품을 대하는 데에 대한 새로운 태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활동을 통해 가장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감자”를 연기로 풀어내고 표현하는 것이었는데요, 이 소설은 이미 읽어 알고 있었지만 건조하고, 별 재미도 없고, 단순히 시대적 의의 때문에 높게 평가 받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 소설의 내용을 이미 완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연기로 풀려면 그저 소설 속 내용을 생생하게 그대로 연기해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것은 소설을 평면적으로, 문자적으로 읽었던 제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팀원들과 함께 얘기하며 소설의 많은 부분들이 꽤 모호하고 의미심장하여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래에 적힌 질문들은 팀원들이 가졌던 의문입니다.


문체가 무심하고 건조했기에 오히려 세세하게 서술한 작품보다 더 다양한 가능성과 연결된 통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과제는 같은 작품이었지만 두 개의 다른 팀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연출과 분위기로 극을 재구성하여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도 제대로 해보지 않았던 “연기”: 사람들 앞에서 나를 드러내고, 타인과 교감하여 또 다른 인물을 이해해보는 경험. 이 새로운 경험은 길진 않았지만 분명 제게 스스로를 보는, 그리고 세상을 보는 새로운 감각을 심어준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도 스스로를, 세상을 새롭게 감각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때 놓치지 않고 꼭 잡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