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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옷 - 구해빈

DEMA Studio 2018. 7. 5. 16:53


저의 관점 공유 주제는 ‘body and fashion’, 몸과 옷입니다. 이번 관점 공유로 전공에 대한 것을 하고 싶기는 했는데 무슨 내용을 할 지 생각하니 좀 막막했습니다. 2학년까지밖에 마치지 않아서 전공에 대해 아직 많이 안다고 자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젠더 통념에 관한 생각을 패션이라는 언어로 풀어내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의복은 사람들의 몸에 걸쳐짐으로써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꼼데가르송의 오뜨꾸뛰르를 보면 저걸 누가 입고 다녀.’라고 싶을 정도로 형태가 과장된 옷들이 많습니다. 그런 옷들조차도 일단은 모델이 입고 있습니다. , 의복은 인간의 신체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의복은 신체 표현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체에 관한 한 인간의 정체성과 의복은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와 가치관을 표현하기 위해 의복을 입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가 착용하고 있는 의복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부르디외가 패션을 신체적으로 자기를 구성하고 표출하는 능동적 과정이라고 주장한 것은 의복 착용을 통한 정체성 표현과 관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패션에 관해 부르디외와 조금 다른 입장을 펼친 사람으로는 버지니아 울프를 꼽을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라는 책을 보면 주인공의 성별이 계속해서 변하고, 주인공이 착용하는 옷도 계속해서 변합니다. 주인공은 어떤 성별의 옷을 입었냐에 따라서 어떻게 행동할까를 고민합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난해하고 와닿지 않았던 책이었는데, 나중에 버지니아 울프가 “옷에 의해 사람들의 세계관도 변하고, 사회적인 입장도 바뀐다. 우리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옷이 우리를 입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증명해주는 것은 수없이 많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왜 그런 책을 썼는지 약간은 알 수 있었습니다. 의복에 관해서 부르디외와 같은 견해도 성립하지만, 울프는 의복이 인간의 가치관〮정체성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정체성과 신체를 표현하기 위해 옷을 입는 행위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많이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관점 공유에서는 옷을 통해 정체성과 신체가 형성되는 과정, 조금 더 좁게는 젠더에 관한 얘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옷을 통해서 젠더와 관련된 사회의 지배적 담론을 학습하게 됩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사회〮경제적 장치만을 통해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의복과 같은 일상적 영역 또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장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들은 의복 선택을 오로지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복 선택은 오로지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유행과 트렌드가 작동하는 영역이며, 유행과 트렌드는 우리 사회가 전파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와 아예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스러운 옷과 여성스러운 옷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전형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생물학적 남성은 어때야 한다.’, ‘생물학적 여성은 어때야 한다.’, 더 나아가 성의 이분법과 관련한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의 결합을 통해서만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엄마, 아빠, 자식으로 이루어진 핵가족 단위의 정상가족이 만들어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이 끊임없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인간의 신체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특별한 자세나 동작, 몸짓을 분명히 나타내도록 훈련되었습니다. 그 훈련의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던 것이 의복이었습니다. 패션 시스템은 수용 가능한 코드와 관습의 명시적 의미를 구체화하고, 복식 행동을 제한합니다. ,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섹슈얼리티는 신체가 입혀지는 방식으로 각인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생각하는 이상적 신체상을 여성에게 주입한 패션시스템의 대표적 사례로, 다들 알고 있을 법한 코르셋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코르셋은 정숙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의복입니다. 코르셋을 입은 여성은 몸을 앞으로 숙일 수 없어서 남편에게 신발끈을 묶어달라고 해야 했으며 코르셋 때문에 기절하는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혼자서 입고 벗을 수 없었기 때문에 타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의복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여성들은 순종적이고 의존적인 여성상을 무의식적으로 학습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에는 느슨한 가슴, 출렁한 가슴, 헐렁한 옷차림은 창녀나 해이한 몸가짐을 의미해왔습니다. 따라서 사회가 원하는 정숙한 여성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가슴 압박은 필연적이었고 잘록한 허리라는 당시의 이상적 신체상과 결합하여 코르셋이 탄생한 것입니다. , 코르셋은 인간의 신체를 훈육하는 도구였습니다. 코르셋을 착용함으로써 여성은 당시 사회가 바랐던 유순한 성향을 내재화하였습니다.

 


오늘날은 55 사이즈의 탄력적이면서도 마른 신체상이 이상적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는 강한 여성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하는 가냘픈 여성의 몸이라는 우리 사회의 생각이 가시화된 것입니다. 사실 여성의 모습은 한 가지가 아닌데, 우리가 여성스러운 옷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옷들은 상당히 한정적일 것입니다. 쉬폰 소재의 하늘하늘한 옷, 어느 정도 타이트하여 여성 신체만의 곡선을 강조할 수 있는 옷 정도일 것입니다. 파워숄더 의상과 같이 강인한 여성상을 강조하는 의복들은 스모키 메이크업과 더불어 기 쎈 언니로 규정되어 예외적 존재나 희화화의 대상이 되기 일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선택의 여지가 존재하는 의복을 통해서 의복을 통해서 젠더 통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얘기했는데요. 지금부터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교복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해요. 그런 의복일수록 사회가 주입하고자 하는 생각, 우리 사회의 관습적 코드를 더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교복에선 남학생은 와이셔츠와 바지를, 여학생은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는 것이 일반적으로 여겨집니다. 이전에 비해 많은 학교에서 여학생에게 바지 교복 착용을 허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치마 교복 착용을 원칙으로 하는 학교가 훨씬 많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것은 남녀의 신체적 차이에 입각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남성은 활동성을 고려하여 직선적 형태의 상의와 편안한 바지를 착용하고 여성은 곡선적인 신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할 수 있는 블라우스와 치마를 착용하는 것이 오랜 기간 동안 인간 사회의 규범으로 여겨져 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과연 진정한 차이에 입각한 착장 형태인지 생각해봤습니다.

 


모든 패턴은 원형 패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무 장식 없이 인체의 형태에 꼭 맞게 제작된 스커트 원형, 블라우스 원형, 팬츠 원형 등을 변형해서 조금 더 복잡한 형태의 의복이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린세스 라인 블라우스도 여성복 블라우스 원형 패턴을 변형한 것입니다. 왼쪽 패턴 허리 부분의 얇은 선이 원형 패턴이고, 굵은 선이 프린세스 라인 블라우스의 허리선입니다. , 원형 패턴보다 허리가 더 잘록하게 들어간 것이 프린세스 라인 블라우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오른쪽의 패턴은 허리 부분이 직선에 가깝습니다. 프린세스 라인 블라우스 자체가 여성미를 극대화하는 의복 형태라는 생각 하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잘록한 허리가 이상적 신체 쉐입이라는 우리 사회의 생각에서 비롯된 변형입니다.

 


또한 여성 블라우스 소매 패턴을 보면 끝이 볼록하고, 남성 와이셔츠 소매 패턴을 보면 끝이 오목하게 설계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블라우스는 옷걸이에 걸어놨을 때 차렷 자세가 유지되어서 아름다워 보이는 형태로 설계되고, 남성의 셔츠는 팔을 구부렸을 때 아름다워 보여야 하기 때문에 소매의 모양을 오목하게 만들어서 가장자리쪽이 더 길도록 설계되는 것입니다. 이는 여성은 활동이 없이 대부분 앉아서 지내고, 남성은 활동성이 클 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복과 남성복 상의는 봉제 방식에서도 차이가 존재합니다. 여성복의 경우 소매 부분 봉제와 몸판 옆선 부분 봉제를 해놓은 후, 암홀을 봉제합니다. 그에 비해, 남성복은 옆선부터 소매까지 한꺼번에 봉제하게 됩니다. 그렇게 봉제 하게 되면 활동하면서 옷이 터질 확률도 적고, 팔을 들고 내리기에도 더욱 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학생 교복의 기본적 형태는 바지, 여학생 교복의 기본적 형태는 치마로 규정된 것 또한 역시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스러운 몸으로 길들이는 작용의 일환이 될 수 있습니다. 치마는 바지보다 불편한 것에 더해, 스타킹과 속바지를 입어야만 하는 교복 치마 착용은 신체 압박 경험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또한 치마 교복 형태도 사진에서 보이는 세미타이트 스커트 형태라서 아무래도 더 불편할 수 있습니다. 치마 재질 또한 문제인데, 교복 치마의 안감으로는 보통 폴리에스터를 사용해요. 폴리에스터는 흡습성과 투습성이 나쁜 단점을 가지기 때문에 여름용 피복재료로 부적당하고 정전기가 축적됩니다. 여름철에 교복 속치마가 다리에 달라붙고 감기는 현상을 겪는 것도 폴리에스터 원단의 단점 때문입니다. , 교복 바지가 치마에 비해서 여름철의 쾌적함과 겨울철의 보온성에 있어서 우수한 성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학생 교복의 기본은 치마입니다.

 


치마를 착용하는 여학생들은 높은 계단에서 내려올 때 속이 비칠까봐 조심하며, 타이트한 스커트의 형태로 인해 스커트가 좁아 급할 때 뛰어다니기도 힘든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건 저도 당해봤는데 속바지가 보일 것 같으니 처신 똑바로 하라는 지적을 듣기도 합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공론화가 된 문제인데 여름용 하복은 굉장히 짧아서 버스 손잡이를 잡기 힘든 경우도 많습니다. 교복을 입음으로써 여학생들은 여성다운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불편한 것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생각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입 받으며,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다움을 체화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교복을 입음으로써 여성다운 태도가 무엇인지, 이러한 형태의 옷을 입었을 때는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읽었던 패션 관련 책에 나오는 인상 깊었던 구절로 관점 공유를 끝내고 싶습니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기존에 보았던 방식에 의존해서 그것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육체를 본다는 것 역시 옷이 구축한 육체를 보는 것이에요.

 


이 구절을 읽고 든 생각은, 제가 이번 관점 공유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전달하려던 생각과 같습니다. 자연스러운 육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간 관계상, 남성의 옷이나 남성의 육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장 폴 고티에는 의복 영역에서 젠더 통념, 일반적인 것에 대한 통념에 도전한 사람입니다. 그는 남성용 스커트를 만들어서 지속적으로 쇼에 선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여성이든, 남성이든 이런 형태의 옷을 입어야만 한다는 당위는 없습니다. 성의 이분법 자체가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을 가진 개체가 아닌, 남성과 여성 더 크게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으로 종속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여성스러운 몸, 여성스러운 옷, 남성스러운 몸, 남성스러운 옷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저조차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것들은 허상일 수 있다는 뭔가 거창한 말로 관점 공유를 마치고 싶었는데요.

 


조금 찔리는 마음에 현실적인 얘기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했지만 저도 제 생각에 대한 자기 모순을 많이 경험합니다. 패션쇼 헬퍼를 할 때 굉장히 마른 모델을 보고 역시 쇼에서는 마른 모델이 입어야지 확실하게 디자이너의 의도를 보여줄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아마 의류 회사를 가게 된다면 벤더나 기획MD쪽에 관심이 있는데 패션마케팅 분야에서는 트렌드를 분석해서 최대한 많은 수익을 창출해야 하므로 우리 사회의 이상적 신체 쉐입에 맞는 옷을 고려하게 될 수 밖에 없겠지요. ‘몸과 옷이라는 주제로 관점 공유를 했던 저조차 자기 검열을 하면 딱히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 관점 공유를 통해서 하고 싶었던 것은 “‘여성스러운 옷’, ‘여자여자한 옷’, ‘남성스러운 옷이런 말 쓰는 사람들 다 잘못됐고, 이분법 다 부숴야 돼!”가 아니라 이 세상에 원래부터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한 번쯤 스쳐지나가듯이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