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ssions/DEMA Talks

참을수없는 존재의 가벼움 - 구현정

알 수 없는 사용자 2017. 3. 4. 23:11

안녕하세요 구현정eyes입니다. 제가 최근에 보고 읽은 것중 함께 공유하고 싶었던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인데요. 이 책에 대한 등장인물이나 줄거리 요약보다는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졌던 궁금증과 그 답을 어디서 찾았는지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책의 기본적인 성격을 알고 제 이야기를 들으시면 도움이 될 거 같은데요. 이 책은 성찰적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서, 절대적 진리로 군림하는 모든 지배문화와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거기서 더 나아가서 피지배문화와 피지배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선에 대한 경고까지 이어집니다. 즉 작가는 서로 자신만을 절대적 진리로 내세우는 독선과 확신으로 인한 눈멂을 경계하는 것이죠. 그리고 주류문화에서 제외되고 배제된 하류문화와 개체의 삶을 중시합니다. 소설의 이러한 큰 특성에 대해 유의하시면서 제 관점공유를 읽으실 때에도 제가 절대적 진리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시기 보다는 작가의 부분적 생각을 말한다고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작가가 존재의 본질적인 속성인 가벼움을 표현한 ‘einmal ist keinmal’라는 문장은 한번 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라는 의미인데요. 이를 우리의 삶에 대입하면 한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실제 살아가고 있는데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게 무슨 의미인지 와닿지 않으시죠? 이 문장을 우리의 실존 자체에 대한 부인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삶에 부여하는 수많은 의미들에 적용해서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모든 선택이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하지만 우리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리허설을 한번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한 선택이 가치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우리의 삶이 반복된다면, 정말 똑같은 하루가 또 존재한다면, 그 두날의 선택을 비교하여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 평가할 수 있겠죠. 하지만 흘러간 하루는 내일과 전혀 다른 하루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어서 한편으로는 삶의 잔혹함과 아름다움조차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einmal ist keinmal은 책의 초반에 나오는 문장인데요, 저는 이 문장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이 책을 읽을 당시에 잠시 쉬었다가 제가 이 문장을 받아들일 마음가짐이 되었을 때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왜 저는 존재의 가벼움을 받아들이는데 그렇게 참을 수 없었을까요? 책을 읽는 내내 고민을 하면서 책의 후반부에서 어느정도 답을 찾았는데요. 그 원인은 우리가 키치의 왕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키치라는 단어는 19세기 중엽에 생겨난 독일어 단어인데, 밀란 쿤데라는 키치라는 용어의 형이상학적 가치에 중점을 두었기에 저도 작가의 관점에서 키치란 무엇인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키치란 자신의 시야에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미학적 이상인데요. 미학적 이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데 왜 나쁜 것이지?’라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초점은 자신의 시야에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입니다. 키치는 삶의 근원적 속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삶을 바라보는 거짓된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키치가 삶의 근원적 속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떻게 위험한지 저희가 흔히 접하는 전쟁 애니메이션이나 마블시리즈 같은 영웅 영화들을 통해서 예시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러한 만화나 영화에서는 전쟁의 추함을 배제하고 항상 폭발 비슷한 것으로 사람이 죽었다는것을 애매하게 암시하고 그들이 죽어가면서 느꼈던 고통을 제거해버립니다. 그리고 영웅과 악당의 대립구를 통해 악당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당연히 제거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영웅의 감수성에 완전히 이입하게하여 영웅의 모든 잔인함과 폭력성을 미화시킵니다. 키치는 그러한 방식으로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실을 삼켜버리고, 하나의 꾸며지고 날조된 조형적 삶으로 게워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키치는 항상 모두가 반박불가한 보편적인 감수성을 기반으로 삼는데 심정에 호소하여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서정성은 반기를 들 수 없게 입막음하는 수단이 됩니다. 감수성은 인간에게 필수적이지만 그 감수성이 하나의 가치 진실의 기준 혹은 행동의 정당화로 간주되는 순간부터 보편 정서’ ‘국가 정서라는 이름으로 가장 끔찍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키치의 왕국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잡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키치는 현실을 감추고 그 안에서의 삶이 아름다운 것처럼 기만하기에 계속 경계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저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속 인물들이 그들 삶의 경계선을 넘는 것을 보면서, 전체주의적 역사 속에서 인간의 실존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인물들은 모두 보편일률적인 삶의 방식에 의혹을 제기하고 그러한 삶을 부인하며 역사의 지배를 벗어나는 선택적 삶을 살아갑니다. 또한 작가는 인간을 구속하는 세계인 비판 대상으로서의 낙원과 인간에게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주는 낙원을 구별함으로써 진정한 낙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앞을 보지 못하지만, 너무 밝은 빛도 마찬가지로 앞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저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은 빛과 어둠으로 인해 눈이 멀지 않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를 주는 책이었습니다. 많은 분들과 이 책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관점공유를 마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