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ssions/DEMA Talks

아슬아슬 싯다르타-김채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12. 7. 00:38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서 생각하고 공감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저는 타인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공감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삶을 완벽히 똑같이 사는 것도 불가능한데다 설령 그런다 하더라도 같은 것을 느끼지는 않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이 전하고자하는 의도는 내 안에서 내가 경험한 것에 따라 변형됩니다. 또한 본인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싯다르타>는 싯다르타가 목마름과 고뇌를 해소하기 위해 길을 떠나 깨닫는 이야기입니다. 책의 초반, 싯다르타는 바라문 계층의 아름다운 아들이자, 어디에서나 환영받는 존재였지만 정신의 만족을 위해 길을 떠나 세상의 모습들을 멸시하고 속임수 투성이라고 생각하며 사문들과 고행합니다. 그는 자아를 잊으려고 하며 그에게 인생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극심한 고통입니다. 




 가르침을 받으려 찾아간 곳에서, 싯다르타는 남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며, 앎은 이미 자신의 안에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하는데요. 가르침에 따라 자신을 억누르고 조각하려는 것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 속세의 삶, 쾌락의 삶을 살아갑니다. 카말라로부터 ‘사랑’을 배우는데, 싯다르타가 새롭게 세상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사랑에 의문을 가지려고 했지 않을까요? 심지어 이렇게 시까지 짓습니다. 카말라가 소개해준 카마스와미의 집에서 일하며 큰 부도 얻게 되죠. 




 그런데 오랫동안 그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싯다르타는 쾌락과 욕구, 태만, 탐욕에 사로잡혀버립니다. 노름에 광분해서 덤비기도 하는데, 아무런 신비 없이 미지근해져버린 삶에서 도피하여 어떤 자극이라도 받기 위해서입니다. 병든 싯다르타는 회의를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며 인생을 되짚어보다가, 끝없는 유희가 고통이었음을 느끼고 바로 그날 밤 그곳을 떠나는데, 곧 이어 그것 역시 제대로 난 길이었으며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많은 철학자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긁어 부스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것을 문제화해서 탐구하고 고민하기 때문인데요. 이런 고민들은 삶에 풍부한 수분을 더해주고 자신을 깊게 응시할 수 있게 해주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깊게 파고든 생각들이 되려 닥치는 대로,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막아버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나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했을 때, 저는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생각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저를 잡고 휘두르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책을 읽으면서 끝없이 유희를 즐기는 삶을 지향하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쾌락과 욕구, 태만, 탐욕. 지나치면 위험하지만 삶을 반짝반짝 윤기나게, 탐스럽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쾌락 등을 줄 수 있는 것을 계속 찾아가는 것 아닐까요? 싯다르타가 고행할 때 그랬던 것처럼, 생각이 너무 많은 것도 위험한 것 같아요. 그때그때 변화하는 삶을 제대로 느끼고 즐기기 어렵게 만들니까요. 싯다르타는 자아를 샅샅이 분석하고 자신을 잊으려는 것을 멈춘 후에야 사랑을 배웠으니까요. 

 여러분의 삶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나요?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실 건가요? 

 균형을 맞춘다는 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생각이 많은 쪽으로 기울 때가 많지만, 충동을 온 몸으로 느끼는 연습도 하려고 해요.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