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 최예지
안녕하세요. 저는 최예지입니다.
디마에서 활동한지 벌써 어언 4개월을 채워갑니다. 지금까지 세 번의 프로젝트를 꽤나 많은 사람들이랑 같이 했어요. 제게 디마는 익숙하기도 하지만 낯설고, 적응한 듯 적응하지 못한 것 같고 아주 애매모호한 존재입니다. 저는 아직 디마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뭐 그렇다고 디마가 유별나게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사실 저는 많은 것들을 모른다고 말하거든요. 입에 달고 살아요, 모르겠다고. 아 혹시 오해하실까 덧붙이는데, 저는 모른다는 것을 좋아해요. 저는 오늘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라는 말로 제 관점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초장부터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제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건 정의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당신에 대해 어떤 말을 해버리면 그건 당신을 정의하는 게 되는 것과 같아요. ‘너는 이기적인 사람이야’라고 이야기 했을 때, 저는 그 사람의 이기적인 모습만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또 ‘너는 활동적인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의 활동적인 모습만 마음에 담는 것 같고요. 나이나 전공을 기억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보는 하나의 틀이 되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을 A과 00학번이라는 특성으로 기억했을 때, 생기는 틀이 있다고 해야 하나. 물론 나이와 전공을 기본적으로 알아둬야 할 때도 있으니까 기억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지만, 또 굳이 기억하려고 애쓰지도 않아요. 과랑 나이보다 나한테 소중히 여길만한 그 사람의 특성은 많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전공이나 나이를 구태여 내 뇌리 속에 남겨서 다른 모습들을 보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아예 당신을 알지 못한다고 여기고, 이런 저런 틀을 두지 않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 당신의 여러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요. 대신 그냥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던 간에, 저 자신은 그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제가 이미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엔 양심이 좀 찔리니까, 그런 사람이고 싶어하는 걸로!)
‘나는 나 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제가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은 저 자신을 볼 때도 적용이 되곤 해요.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고,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싶지도 않아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교육학을 전공하고 있고 교육에 관심이 있어서 이 과에 왔지만, 그 전공이라는 틀에 묶여서 다른 좋아하는 것들이나 재능 있는 것들을 놓칠 것을 염려해요. 그래서 저는 교육학도로써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이것 저것 해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조정이라는 운동도 몰입해보고, 또 디자인에도 관심이 있으니까 타이포그래피도 해보고, 이렇게 디마에도 들어오고요. 얼마나 더 제가 즐거이 할만한 일들이 많이 있을지는 또 모르죠. 얼마 전에 만났던 친구가 저에 대한 인상을 이야기해주었어요. 처음 봤을 때는 성숙하다 생각했고, 방금 전까진 너도 스물 둘 제 나이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저는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해줬을 때 내심 기분이 좋았어요. 나를 모르겠는 사람으로 생각해주어서 좋고, 또 내가 나를 보듯 타인이 나를 봐주는 것 같아 기쁘고요.
알지 못한다는 건 정말 매력적입니다. 무엇이 되었던 간에 내 멋대로 규정짓지 않고, 자유롭게 여행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 같아서요.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말로 담아 낼 수 없는 다양하고 독특한 모습들이 있는데, 그걸 정의해버리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래서 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렇게나 아끼고 좋아해 왔습니다. 그런데 모른다 말하고 정의하지 않는 것이 양날의 칼과도 같더라고요.
저는 최근 한 한달 동안 우울의 늪에 빠져있습니다. 혼자 우울해하면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도 영향을 끼칠 만큼이었으니까 꽤나 우울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우울함이 ‘알지 못함’이나 ‘정의 내리지 않음’에서 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 관계에 있어서 정의입니다. 저는 한 사람에 대해 다양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정, 존경심, 증오, 고마움 다양한 감정을 한 사람한테 느끼는데, 그걸 하나의 이름을 지닌 관계로 이야기하는 건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관계를 정의하기보다는, 애매모호하게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 같은데, 이게 오히려 스스로의 마음을 잘 알아주지 못하고 방치했던 것 같아요. 인간관계에 있어서 감정 앞에 솔직해져도 되는데, 괜시리 ‘아 이만큼만 해야겠다 하고’ 선을 긋는 거죠.
그리고 내가 나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나 마나, 다른 사람들은 나를 정의하죠. 그리고 그것을 내가 기분 나쁘게 여길 것도 없고요. 앞에서 이야기한 ‘알지 못함’의 관점은 주로 제가 타인과 제 자신을 볼 때의 관점이었어요. 나의 관점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관점을 요구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근데 앞서 이야기한 친구가 나를 모르겠다고 하니까, 그 친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궁금했어요. 저를 누군가는 ‘말이 없는 사람’이라 이야기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호탕한 사람, 또 누구는 똑 부러지는 사람, 소심한 사람, 역동적인 사람 등등. 디마에서는 또 어떤 사람일지 모르겠네요. 이렇고 저런 다양한 나에 대한 정의 중에, 스스로 짐작하기에 가장 많을 것 같은 정의는 ‘차분함’일 것 같아요. 안다고 하기 싫어서 말을 아끼다 보면, 말의 무게가 무거워지고, 다양하게 나를 해석하고 싶었던 나의 의도와 모순되게 나는 ‘차분함’이라는 정의를 얻었을 것 같아요. 사실 내가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외톨이가 아닌 이상 나는 타인들에 의해 정의되겠지요. 그렇다면 아예 정의하지 않는 것 보다, 많은 정의를 하는 건 어떤가 싶었어요.
그래서 정말 간만에 모토를 삼은 말이 있어요. 사실 좌우명 이런 것도 삶의 지침이니까, 꼭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고, 내 기존의 삶은 무시하는 것 같고 이래서 싫어했는데 뭐 어쨌든 모토가 생겼네요. 그게 뭐냐 하면, ‘지껄이자!’입니다. 지껄이고 싶어요. 사실 말을 하면 그게 또 정의가 되는 게 싫은 건 여전해요. 그런데 말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 무기력해지고, 그 침묵의 상태가 또 다른 의미의 정의를 만들잖아요. 그래서 몰라서 무식해지고 싶어요. 몰라서 망설이고 헷갈리는 것 보다, 몰라서 멋대로 많이 이야기하고 또 판단하고 그러고 싶어요. 많이 안다고 이야기하다 보면, 그것도 다시 정의 내리지 않는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요즘 ‘지껄이자’를 모토로 삼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저는 모르는 게 좋아요. 아마 지껄이자는 건, 너무 극단적이게 “나는 몰라!!!!빽!!!!”하지 않고자 하는 장치인 듯도 해요. 대척점에 있는 ‘지껄이자’와 ‘나는 몰라’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는 게 제 딴에는 참 모순적인 이야기이죠. 제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어쩌면 평범한 고민인데 어렵게 이야기 한 것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최대한 나를 솔직하게 담아내고자 했는데, 내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모습만 담아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정리하고 정리했는데도, 여전히 정리가 안되네요. 결국 이건 ‘나는 알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지껄이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보고자 하는지 지껄이는 글을 읽어줘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