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ssions/DEMA Talks

드러내다 - 서유현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6. 3. 12:30


안녕하세요, DEMA STUDIO 서유현 Heads입니다.


1.

우리는 살면서 아주 많은 것들을 보고, 듣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어떠한 느낌이나 감정들을 같게 되지요.

우리는 생각합니다. 아니,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것들 이라고.


얼마 전 저는 여행에서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습니다.

'남이 보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 물음을 던진 후 제게는 하나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습니다.


저는 6살 쯤이었고, 제 동갑인 사촌과 함께 그네를 타고있었습니다. 그런 저희에게 어떤 아주머니께서 다가와 ‘’네가 언니지?”라고 저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물어보려고 하셨던 것 같지만 사실 그 질문 이외에 그 상황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없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왜 저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으며, 그것도 하필 ‘남이 보는 나’에 대해 생각하려고 한 순간 그 기억이 비집고 나왔던 걸까요? 지금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이 보는 나’에 대한 무의식적인 내 스스로의 답이었다고요.



2.

저는 이상하리만치 남들에게(어른, 그리고 친구 모두에게) ‘어른스럽다’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저에게 그것은 매우 익숙하면서도 강력한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른스러운 아이’가 되기 위하여 나름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린 제가 생각하는 어른스러움은 ‘의연함’ 같은 것이었나봅니다. 감정의 동요가 없는 그런 상태, 를 보이는 것이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언젠가 제가 ‘모든 것을 설명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것에 매우 공감했습니다. 설명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지, 타당한지, 상식적인지에 대해 판단하려고 한다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안에 제 감정까지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전에 앞서, 내 감정상태가 어떤지에 대한 인지가 잘 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였습니다.



3.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감정이란 내가 이해하려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과정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정을 표현하는데에 매우 서툴었고, 그것은 표현보다는 표출에 가까웠습니다. 표현과 표출은 비슷하지만 아주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현’이란,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언어나 몸짓 등의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이고 ‘표출’이란, 단순히 겉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즉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어떤 생각 혹은 느낌을 가졌는지 인지하고 그것을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결정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많은 것들을 언어로 표현하고, 놀랍게도 비언어적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해서 자신의 생각이나 상태, 감정 등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관점공유를 준비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 막막함 역시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에 대한 인지의 과정, 그리고 이것을 언어적으로 혹은 시각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표현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경험들을 통합하고 정서적 통찰을 얻기도 합니다. 자신의 정서 경험이 무엇인지 명명하고, 사실들을 연결 지으면서 경험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정서적 사건은 더 견딜만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4.

사실 제가 이 관점공유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나에게 춤이란?’에 대한 대답 같은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감정 표현에 서투르며, 제 감정을 제대로 자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앞뒤 맥락 안에서 이러한 감정이 합당한가를 자꾸 판단하려고 들곤 합니다. 그러니까, 춤을 춘다고 해서 이런 내 오랜 습관들이 고쳐진 것은 전혀 아닌 것이죠. 그리고 사실 이런 생각도 춤을 추기 때문에 정리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의 끝에 나에게 춤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제 감정처럼 춤은 저도 모르는 새에 저에게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춤은 크게 두 가지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자유로서의 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발견으로서의 춤’입니다. ‘자유로서의 춤’은 소요유의 도달을 말합니다. 소요유란 마음과 감정에서 벗어난 경지 또는 그것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사고의 기능이 있는 마음이나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또 다른 하나의 방향인, ‘발견으로서의’ 춤은 어떤 이유에서였건 잠재되어 있던 혹은 억제되어 있던 나의 모습을 어떤 거부감 없이 발견하게 되고, 그것에 자연스럽게 끌려 그 안에 나를 묻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방향성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길을 만들게 할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같은 주제에 대해 같은 형식으로 글을 써도 사람마다 조금씩 혹은 확연히 달라지게 되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아마 춤이 가지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춤에 대한 인식은 감각과 기억을 통해 진행된다고 합니다. 감각은 존재를 감지하고, 기억은 존재를 생성합니다. 춤을 마주할 때 감각으로 지각되는 것이 외부상황이라면 그 외부 상황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의 유래를 추론하는 것이 기억이고 이러한 기억 의식은 상징을 생성합니다(한혜리, 『무용사색 사이와 거리』, 한학문화, 2011). 이러한 인식의 작용들은 역으로 춤을 만들어낼 때에도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기억의 파편들, 그것들이 상징이 되고 몸짓이 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춤은 각자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5.

춤이 가지는 이러한 (더 있을지 모르는)방향성들을 깨닫고 그 안에서 열심히 탐험하는 것은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전히 감정 전달에 서투르고 노력이 필요하고, 또 저는 여전히 춤을 좋아합니다. 중요한 것은 저의 문제들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이해한 후로 춤을 추는 것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저 즐거움의 하나, 취미로만 생각했던 일은 저도 모르는 새에 저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저처럼 그것이 나의 언어인지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돌아보길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