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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s/DEMA Talks

나를 박제하다 : 치부 - 박준규


나를 박제하다:치부

 




안녕하세요 이번 관점공유를 맡은 박준규입니다.

주제에 대한 고민

이는 제가 이번 관점공유에 다루려 했던 주제들입니다. 몇 주제들을 통해 눈치 채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전 평소 굉장히 추상적이고 모호한 이야기들을 즐겨 합니다. 사회적인 이야기나 구조적인 이야기도 많이 하구요. 그래서 제가 평소 자주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관점공유를 하려다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뭔가 좀 잡히는 네 얘기를 한번 해봐.” 무심코 던진 말이었겠지만 꽤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사회현안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가치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평소 대화 속에서도 제 생각을 말할 기회가 있지만, 온전히 내 경험에 대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말할 기회는 생각보다 흔치 않으니깐요. 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럼 뭘하지…’

 

나를 드러내다

왜 이렇게 깊이 고민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기껏해야 한번의 발표인데, 왜 내용도 아니고 주제에서부터 이렇게 고민하는지. 이젠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잘하고 싶어서.’ 그 한번의 발표에서도 잘 보이고 싶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런 나(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가 아주 강한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부정하다 내 안의 자기모순에 휩싸여 힘든 시간을 보냈던 날들이 기억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를 드러내자. 내가 가진 부끄러움들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보자. 이젠 할 수 있을 것 같아.’

 

치부 그리고 박제

치부의 사전적 정의는 아래와 같습니다.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아니한 부분, 혹은 음부. 저는 꽤나 비밀이 많습니다. 어떤 비밀은 제 스스로도 숨긴 탓에 그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를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 관점공유를 통해 좀더 날것의 자신을 드러내고, 그러한 자신을 마주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습니다.

사실 나를 박제하다라는 제목을 단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번의 발표로 끝이 나는 내용이라면 박제라는 표현까지는 쓸 필요가 없지요. 이유는 이 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니 이 글에서 찾는다기 보다는 이 글 자체이지요. 이 모든 내용이 글로 남고 그 내용들은 그리고 저는 계속해서 이 페이지에 박제되어 다른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테지요.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듯이.


본격적으로 주제에 들어가기 전, 양해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제가 이런 대화체로 글로 쓰는 일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름 문체가 가지는 힘에 믿음이 강한지라, 아래의 내용들은 조금 딱딱하게 들릴 수 도 있는 어투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딱딱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제가 생각하는 느낌을 전달하기 위함임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나를 설명하는데에 글보다 사진들이 나을지도 모른다



유년시절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거짓말을 잘했다. 물론 들킨 적도 많았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적도 많을 정도였다. 유치원을 다닐 적 친구의 장난감을 훔친 적이 있다. 처음엔 거짓말로 넘어갔지만 부모님이 사주지 않은 장난감이 점점 늘어나자 결국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들키는데 까지 시간이 꽤 걸릴 정도로 거짓말을 잘했다.


물론 아주 어렸을 때였지만 난 내가 물건을 훔친 일을 어린 맘에..’로 포장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얼마나 어릴 때부터 영악했는지. 나는 이미 그때 어린 맘에..’가 가져다 주는 면죄부를 알고 있었고 이를 혼날 때 자주 이용해 먹었다. 유치원 때였지만 그런 마음으로 다 알면서도 도둑질을 했던 적이 꽤나 많았다. 다행히도 부모님은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매를 그때’(친구의 물건을 훔친 것이 들통이 낫을 때) 드셨고 그 이후로 누군가의 물건을 훔친 적은 없다.


하지만 떳떳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유년시절을 지나서도 주인을 모르는 물건들, 아니 솔직히 말해 찾아내려면 찾아낼 수 있는 물건들(교실에 떨어진 샤프, 길가다 주운 모자, 집 주변에서 발견한 시계 등)은 아주 비밀스럽게내 주머니로 들어갔다. 여기서 비밀스럽게가 중요한데, 난 그런 물건들을 내가 가지는 것에 대해 떳떳하지 못했음에도 바른 행동(주인을 찾아주거나 적어도 남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다고 알리는)을 하기보다 조용히내 물건으로 만드는 일을 택했다. 샤프에 내 이름을 붙인다던가.. 하는 행동들 말이다.


나는 아주 영악했고 거짓말도 잘했다.



초등학교

초등학교 때 나는 잘나가는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했다. 일부러 그들 틈에 끼고 어울리는 하며 다녔다. 사실 난 기질 적으로 그 친구들과 많이 달랐다. 재미있지도 않았고 깡따구가 그리 쌘 편도 아니지만 선배 말을 잘 들을 성격도 아니었다. 담배는 죽어도 피기 싫었는지 애들이 권유해도 그저 망을 본다고 하며 피했다. 그렇게라도 그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는 놈(나쁜 놈)은 되기 싫으면서도 아무나 나를 건드리게 하고 싶지는(강한 놈)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다시 말하자면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서도 힘을 가진 놈(치사한 놈)이 되고 싶었나 보다.


초등학교 졸업 앨범

 


중학교

중학교 때 첫사랑을 했다. 물론 짝사랑이었지만. 그리고 그 친구를 꽤나 오래 좋아했다. 햇수로 대략 4년정도였는데, 여기서도 또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그 친구를 좋아하던 중 다른 아이에게 마음이 잠시 갔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리 길지 도 않았고 다시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리고 지금 돌이켜봐도 그 친구는 내 첫사랑이었고 정말 많이 좋아했지만, 어쨋든 난 그 사실(다른 아이를 좋아했던)을 철저히 비밀로 간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너 하나만 계속 보고있다) 그 아이에게 내 마음이 이렇게나 간절하다(?)는 것을 어필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결국 혼자만의 사랑으로 끝이 났고 난 ‘4년동안 한 사람만을 좋아한 순정남이 되었다. 혹은 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다른 누군가들의 기억 속에 그렇게 남길 바랬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내가 나에게 말한다.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너도 알잖아?’

(뭐 혹시나, 그렇다고 내 사랑이 왜곡될까 싶어 하는 말이지만, 다시 생각해도 그때의 감정이 들고 그때 들었던 노래들과 그때의 너가 떠오르며 기분 좋기도 또 가슴이 시리기도 할 정도로 난 그 아이를 정말 많이’ 좋아했다.)



이땐 몰랐을 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고등학교시절은 오만과 과시의 끝이었다. 아는 체는 있는 대로 다했고 느낌 있는 척, 멋있는 척, 귀여운 척, 쌘 척 등 척이란 척은 다했다. 내가 가진 것 훨씬 이상으로 말이다. 물론 그럴 시기이긴 하다. 하지만 사람 만나는걸 좋아하는 성격이다 보니 만나는 사람, 무리 마다 다른 나로 사람들을 대했다. 그러자 너무 많은 자아를 가지게 되었고, 도대체 어떤게 진짜 나인지 알 수 가 없어졌다. 물론 진짜 나라는건 결국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지금은 믿는다. 하지만 그와 별게로 이시기에 내가 보인 수많은 다른 자아들은 각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동일하게 가진 것 이상으로 또 필요 이상으로 과시하는 나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행동들이 훗날 나에게 진짜에 대한 집착을 가져다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존재하지도 않는 진짜 나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이는 곧 내가 보잘 것 없는 존재였음으로 귀결하여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온갖 척이란 척은 다 했다



성적욕구

초등학교 2학년때였다. 그땐 탈의실이 따로 없었고 여자애들이 반 안에서 옷을 갈아입으면 남자애들이 기다리고, 여자애들이 나오면 안에선 다시 남자애들이 옷을 갈아입는 식이었다. 그때 몇몇 남자애들이 창문 틈새로 여자아이들이 옷을 갈아 입는 모습을 보려 했고 그 장면이 선생님에게 발각되어 그 아이들은 크게 혼쭐이 났다. 특히 선생님은 여자아이들 앞에서 이 아이들이 한 만행(?)을 고발하며 혼을 내었는데, 여자아이들은 당연하게도 한동안 그 남자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 경험이 나에게 꽤나 충격적(?)이었던 가보다. 이때부터 나는 남자아이들이 모여 여자아이들에게 성(性)적인 장난을 치거나 아니면 자기들끼리 모여 성적인 농담 등을 하는 일들에 끼이지 않았다. 이는 내가 어릴적 부터 성(性)에 대해 아주 철저한 도덕이나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했던 행동들이 아니다. 단지 그 경험을 시작으로 난 그런일들(성적인 장난, 농담)에서 멀어져 갔고, 심지어 가끔은 이런 이야기도 오갔다. “야 준규야, 너도 야동 보긴 하냐?” “에이 야 그래도 쟤도 보겠지~” “아냐 준규는 안볼지도 몰라.. 순수한 애한테 이상한 얘기 좀 하지마!” “뭐래 순수한 척 하지마 쟤도 다 알겠지~” 이런 대화들은 나를 두고 꽤나 빈번하게 일어났고 그때마다 나는 그냥 말없이 서있었다. 어떨 땐 모른 척도 했다. 여자아이들 앞에서 순수한 이미지를 만들어 호감을 사려한 적도 있다.


하지만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난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 성적욕구가 아주 강한 사람이다. 야동도 많이 봤고 자위행위도 물론 많이 했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 숨겨대며 ‘조심스러운 척’ 했던 것에 비해 성(性)에 대한 윤리의식은 아주 많이 부족했다. 오히려 성과 관련하여 폐쇄적인 환경에 놓인 탓에 중 고등학교 때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퇴폐적인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난 여전히 지금도 성적인 얘기를 그리 편하게 하지 못하는 편이다.

(이에 관해 정확히 서술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이를 탈피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표출된 문단이다.)



외모

난 자존감이 높다. 애초에 난 내 삶을 너무 사랑하고 다른 이들과의  그냥 난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내가 인 부분만큼은 자신이 있어서인데, 한가지 그렇지 못한 점이 있다. ‘외모. 난 생각보다(?) 외모에 콤플랙스가 제법 있다.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들이 앞에선 왠지 모르게 수그러드는데, ‘생각보다라고 한 이유는 주변사람에겐 늘 외모에 관해 신경 안 쓰는 척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는지, 어느 센가 난 주변사람들로부터 외적인 부분은 안보고 사람의 내면으로 사람을 보는 사람이 돼 있었다. 절대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내가 내 스스로의 외모를 굉장히 비하하거나 마음에 안 들어 하며, 너무 못난 모습은 보이지 않게 신경을 많이 쓴다는 걸 알게 된 이후였다. 난 늘 내적인 가치에 대해 그리도 읊조리고 다녔는데, 내 눈은 나를 응시하는 거울 속의 내 얼굴조차 회피해왔던 것이다.


 

왼쪽이 내가 거울속에서 늘 마주하는 모습이다. 오른쪽은 '만들어내고 싶은 나'에 가깝다.


 

눈치(소심함)

내 주변사람들이 가끔씩 나에게 그런 말을 한다. “야 너는 진짜 완전 마이웨이인거 같아”, “어떻게 그렇게 남 눈치 안보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냐?”, “너 여행 다니는 거 보면 진짜 아무나랑 쉽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아결론부터 말하면 난 굉장히 남 눈치를 많이 본다. 그리고 소심하다. 주위를 많이 살피고 행동을 결정할 때가 많다. 사실 당연한 것이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 많고 다른 집단들 속에서 잘 어울리는 일이 설명이 되질 않는다. 특히나 모두 제각각 다른 나의 모습을 한 채 말이다.

여행을 다녀 온 사진엔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사진만이 담겨 있을 뿐, 호스텔에서 이야기 할 친구를 찾지 못해 폰만 만지작 거리는 는 담겨져 있지 않다. 그리고 모두는 나의 그런여행사진을 보며 나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었고, 나는 또 한번 그리 당당하지 못한 채 그 칭찬들을 그저 즐겼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내 여행의 모습은 대부분 왼쪽 사진이다. 하지만 오른쪽과 같이

그들와 어울리지 못한채 멀찍히 혼자 시간을 보낸 날들도 분명 있었다.



이 외에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한다거나, 부모님께 용돈, 받을 거 다 받으면서 사회적인 어른인 척하는 일은 거의 일상이 되었다. 노래 좀 듣는 사람들 모인다는 LP바에 가서 그냥 그저 그런 노래가 나올 때에도 뭔가 아는 채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락 페스티벌에 가서 아무 감흥 없는 전설의 무대를 보고 흐느끼는 체 하고 또 그걸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듯(물론 당연 흐느끼는을 했다 자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무대를 봤고 내가 얼마나 열광했는가를 자랑했을 것이다말하기도 하였다.



 

일찍 어른이 된 행세는 엄청 했다


게다가 난 어릴 적부터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고 무언가 타고난 천재인 줄 알았다.(혹은 그러길 바랬거나. 어쨌건) 고뇌하는 척하기를 즐겼으며, 하기 싫은 일이 생겼을 때, 난 천재들이 그랬듯 엄청난 대의를 위해 내 모든 고뇌를 쏟느라 그 일(하기 싫은 일)에 집중하지 못한 척도 많이 했다. 그래서 나는 진짜 천재들(지미 핸드릭스, 앨런 튜링, 짐 모리슨, 르꼬르뷔지에 등)의 작품이나 업적을 보며 나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채 했다. 이는 대부분 스스로에 대한 속임이었다. 실은 난 그저 그들을 동경하며 살았을 뿐이란 걸 알게 된 건, 천재들을 다룬 영화를 보며 끊임없이 나와 동일시 하려는 덧없는 의식들을 발견했을 때였다.


짐 모리슨과 밥 딜런.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예술가들.

 


사실 내가 말한 내용들이 그리 특별한 얘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치부를 드러낸 일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난 이 이야기들을 하려 했던, 치부들을 굳이 드러내려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누구에게나 치부가 있다라는 명제가 아닌 진짜 내 치부들남들에게 드러낸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늘 감춰오고 말하지 않았던 내용들을, 물론 이미 누군가의 눈에는 비췄을지도 모르지만, 이 모든 내용들을 내 입으로 직접남들 앞에서 이야기함으로써 난 조금 더 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믿는다. 남에게 또 나에게 말이다.

둘째는 내가 지금 치부를 어떻게 바라보고, 또 그래서 내가 라는 존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치부를 드러냄으로써 말하고 싶었던 건 이면의 진실이지 이면이 진실이다가 아니다. 나의 숨겨왔던 부끄러운면들을 밝히다 보니 그런 내가 부끄럽다는 듯, 조금은 강하고 자조적인 어조로 나를 비판 하긴 했으나, 그 이면의 또한 라는 것이지 그게 나의 실체다라는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내가 보기에 나와 세상을 가르며, "난 남의 시선따위 신경쓰지 않고 나만의 삶을 살테야!"라는 이야기는 조금 어리석어 보인다. 세상과의 혼재 속에서 내 '의지'를 발현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세상과 나 사이에 선을 긋고 '오롯한 나', '진짜 나'를 찾는 행위는 오히려 더 인위적이다. 결국 내가 마주한 모든것들은 나를 이룬다. 


도대체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한없이 고민하며 나를 둘러싼 껍질을 벗겨냈을때, 그 속엔 남에게 잘보이고 싶은 마음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것을 깨닫고, 내 존재의 가벼움에 짓눌리며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한 교수님이 나에게 무슨 고등학생때나 할 고민을 지금하고 있냐며, 세상은 애초에 와인과 같은것이라 말하실 때, 나는 버럭 화를 냈다. 세상이 순물질이 아닌 와인과 같은 혼합물이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나'라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요한 도구인지는 몰랐던가 보다. 결국은 내가 벗기려했던 그 껍질들은 '겉치레'가 아니라 '나'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껍질을 만드는것도, 만드려 한것도, 지금 그 껍질을 벗으려하는것도 나였던 것이다. '벗겠다'는 결정은 '있다'는 인식 이후의 것이다. 껍질도 있어야 벗는다. (동시에 '있다'라는 인식이 그 껍질을 존재하게 만든다.)


난 언제나 '나'이고자 했지만, 동시에 '나'의 정확한 실체는 없었다. 그건('나'라는건) 진짜도 가짜도 아닌 수많은 의식의 복합체일 뿐이다. 그럼 '나'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것인가? 아니다. '나' ,'박준규'는 여기 이 자리에 분명히 존재하고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그마저도 나'임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나의 삶을 사랑하려 한다.

오늘도 의식의 탄성을 자아내며.


아, 그것조차 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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