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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s/DEMA Talks

절제놀이

안녕하세요. 디마 스튜디오 Hands 김명선입니다.
저는 요즘 식단 조절을 ‘놀이’라고 여기면서 드는 생각들을 공유해 보려 합니다.


Goodbye to 고기, 술, 밀가루


 저는 약 2주 전부터 고기, 밀가루, 술(이하 ‘고밀술’)을 먹지 않겠다고 제 개인 SNS계정을 통해 선언했습니다. 제가 고밀술을 먹는 걸 적발하면 5천원을 주겠다는 호언장담까지 덧붙여서 말입니다. 기간은 집안의 중요한 행사가 있는 10월 초까지, 약 9주 동안이었습니다.

 2주가 지난 현재, 100%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저는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제 선언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채식주의를 실천하거나 건강 등에 치명적이어서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에 기준은 오로지 제가 정합니다. 제가 정하는 ‘고기를 안 먹는다’의 기준은 고기 덩어리 자체를 먹지 않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설렁탕을 먹어도 고기만 빼고 먹으면 괜찮습니다. 또, 고밀술이 아니면 양에 대한 제한은 없습니다. 얼마 전 카레집에 가서는 야채카레를 시킨 후 밥을 추가해 배부를 때까지 잘 먹었습니다.


이러한 저를 보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뭐야, 다이어트하는 거 아니었어?”

“이런 이율배반적인 태도!”

“완전 니멋대로네!”


네, 그럴지도 모릅니다.

타인이 보기에는 좀 황당하고, 이상한 짓을 저는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합니다.

“다이어트하는 게 아니고, 노는 거야. 절제놀이”


절제놀이


(저는 꽤 진지하니까 궁서체로 적어 봤습니다)


 제가 요즘 읽고 있는 <누구나 게임을 한다>라는 책의 저자 제인 맥고나걸은 게임의 본질적 특징으로 4가지 - 목표, 규칙, 피드백 시스템, 자발적 참여 - 를 꼽습니다.


목표(Goal) : 플레이어가 성취해야 하는 구체적 결과
규칙(Rule) : 플레이어가 쉽게 목표를 이루지 못하도록 제약을 만든다.
피드백 시스템 : 플레이어가 목표에 얼마나 다가섰는지 알려준다. 점수, 레벨, 진행률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자발적 참여 : 플레이어는 마음대로 게임에 참여하고 끝낼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 <누구나 게임을 한다>, 42p


 절제놀이는 이 틀에 딱 맞는 게임은 아닙니다.(아니면 제가 찾아내지 못하는 걸수도 있지만요)
 규칙 자발적 참여는 명백합니다. 규칙은 밀가루, 고기, 술을 먹지 않는 것이고, 적발되면 그 사람에게 5천원을 주어야 합니다.(딱히 요구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제가 자발적으로 시작했고, 원하면 언제든 끝낼 수 있습니다.
 피드백 시스템은 좀 애매합니다. 구체적인 지표로 적고 있지는 않거든요. 그냥 매 끼니가 다 퀘스트같고, 고밀술이 아닌 먹을 것을 찾은 다음 이를 먹으면 제 스스로 긍정적 피드백을 합니다. ‘잘 했어!’
 목표는 더 애매합니다.
 사실 이 행동의 시작은 살을 뺀다는 목적이 크긴 했습니다. 얼마 후 있을 집안 행사에서 예쁘게 보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런 식의 목적을 가졌던 다이어트들에서 저는 100% 실패했습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다이어트의 목적은 나를 위하거나(예뻐지고 싶다!) 남을 위하거나(예뻐보이고 싶다!) 두 가지 중의 하나인데요. 나를 위한다고 했을 때는 예뻐지고 싶다!보다는 맛있는 거 많이 먹고 행복하게 살자!는 마음이 더 크고, 남을 위한다고 했을 때는 내가 왜 이 사회의 기준에 맞추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반항심에 부딪힙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에게 ‘살을 뺀다’는 목적은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의 비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표가 도대체 뭘까요?


대철학자 ‘버나드 슈츠’는 게임을 하는 행위를 아래와 같이 정의합니다.
(제인 맥고나걸은 이 정의를 '역사상 가장 설득력 있고 유익한 정의’라고 꼽더군요.)

 이 정의를 보고, 저는 막연히 ‘절제놀이’라고 이름붙였던 제 행동에 정말 게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필요한 장애물(고밀술 먹지 않기)에 자발적으로 도전하는 행위. 그리고 이를 통해 매일, 매끼니마다 승리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게 아닐까.


하지만 문득 궁금해집니다.
왜 나는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고밀술을 먹지 않는 행동을 하면서 승리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물론, 일시적으로는 조금 슬프다는 생각도 합니다.(시간이 지나면서 더 심해질지도 모르죠)
바로 앞에 맛있는 치킨이 있고, 옆사람들은 다 그걸 먹는데, 왜 나는 먹지 않는 걸까. 차라리 치킨 한조각 먹고 밥 조금 먹는게 낫지 않나? 뭐 이런 생각이 안드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경험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책에서는 ‘어떤 경험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긍정 심리학자들의 의견을 소개합니다.

“긍정 심리학계에 다양한 행복 이론이 등장해 경합을 벌이고 있지만 모든 긍정 심리학자가 동의하는 한 가지를 꼽자면, 바로 행복해지는 길은 많지만 행복을 찾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목표, 사건, 결실, 생활환경도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행복은 고유한 보상이 있는 활동을 열심히 수행해서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칭찬이나 보수가 아니다. 활동 그 자체, 다시 말해 완전히 열중할 때의 즐거움,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자발적 자기 보상 활동을 가리켜 ‘자기 목적성(autotelic)’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자기 목적성의 일을 하는 까닭은 한껏 열중함으로써 가장 즐겁고 만족스럽고 뿌듯한 감정 상태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보상적이면서 힘든 일에 규칙적으로 몰두할 수만 있다면 행복한 일상을 누릴 수 있다.” 

- <누구나 게임을 한다>, 75-76p

 제가 절제놀이를 통해서 얻는 고유한 보상은 '내가 나를 절제할 수 있다는 느낌(절제감)'입니다. 고밀술을 먹지 못할 때 일시적으로 힘들긴 하지만, 유혹을 이겨내고 스스로가 가진 통제력을 확인할 때의 기분이 좋습니다. 위에서 기술한 대로 "즐겁고 만족스럽고 뿌듯한 감정”이 생깁니다. 그래서 견딜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고밀술을 먹지 않아서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크게 불행하지도 않은 것 같아요.


 이 놀이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인센티브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제게 절제감이나 통제력을 느끼는 것이 보상이 되는 유인이듯, 어떤 사람에게는 살이 빠지고 있다, 내가 예뻐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보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똑같은 행동을 한다고 항상 똑같은 목적을 띠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이어트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지만 살을 빼는 것이 목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 목표가 자신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다른 유인이 그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유인이 위에서 논의했던 자기 목적성을 가진 자기 보상적인 활동이 된다면,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고 난 뒤에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에서도 그때그때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면 게임이나 놀이처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그 가능성에 대해 논해보고 싶었습니다.


Searching for the meaning



최근 재미있게 본 영화 Begin again의 OST 에는 아래와 같은 후렴구가 나옵니다.



 ‘searching for meaning’이라는 구절이 계속 귓가에 맴돕니다.
 기존의 다이어트에서 저는 의미를 목표에서 찾아보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왜 살을 빼야 하는 걸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케이크를 안 먹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뭘까’ 이런 생각들을 끊임없이 하면서 목표가 가진 의미의 타당성과 가치에 대해 고민하다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해 행동을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절제놀이에서 저는 크게 의미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밀술을 안 먹지만 다른 음식을 양껏 먹어서 살이 하나도 안 빠질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목적이나 목표가 없다고 꼭 의미가 없는 걸까요? 이 과정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감정(절제감) 자체가 의미가 될 수는 없을까요?


의미가 안 보여서 길을 잃은 느낌이 든다면,
어둠 속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냥 그 어둠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reference>

누구나 게임을 한다, 제인 맥고니걸, RHK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